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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숲」에 담긴 예감

이정진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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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된 지도 꽤 되었고 이미 많은 숫자의 기사나 비평이 나온 마당에 뒷북친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비밀의 숲」에 대해 몇마디 꼭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전 처음 ‘드라마 폐인’이 될 지경으로 몰두했지만 뒤늦게 밤을 새워 ‘정주행’을 하는 내내 이 작품의 재미나 호소력이 어디서 오는지 처음에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범죄 추리극이라는 장르물로서의 완성도를 상찬하는 글들이 많지만, 그런 평가는 좀 과장되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공식적인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조승우 역)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심장한 설정도 신빙성 있게 충분히 극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내 잠정적인 해석은 이렇다. 「비밀의 숲」은 분명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여주며, 그 새로움은 이 작품이 모태로 삼고 있는 독특한 한국형 장르, 즉 연쇄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계기로 재벌과 정치권력(특히 검찰)의 공고한 결탁관계가 드러나는 수사물들이 공유하는 여러 전제들을 수정하려는 노력에서 나왔으며, 이런 장르의 혁신은 촛불혁명 이후의 새로운 정치적 정서를 반영한다는 것.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한국사회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굉장히 비관적인 분석을 제시하되, 다만 비관에만 머물지 않고 변화의 물길을 낼 방도 내지 경로에 대한 토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

 

「비밀의 숲」에 대한 거의 모든 글에서 악의 세력에 대한 언급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인상적이지 않다는 말일 텐데, 이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내부자들」(우민호 감독, 2015) 같은 영화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다. 장르의 전범으로 통용되는 그 영화는 (재벌이 정점이자 축이 되는) 악당들을 법과 제도를 초월한, 가히 전지전능한 존재들로 그림으로써 은밀한 동일시를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고, 더 나아가 (물론 절대악의 경지를 표현하기 위함이겠지만) 감정이나 윤리를 초월한 듯한 그들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면에 이 드라마는 한때는 음모론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한국사회가 (오)작동하는 방식임이 드러난 세계상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내부자들」과 비슷하지만, 악당들에 대한 의도치 않은 신비화를 통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사실 이 드라마의 재벌총수 또한 사석에서 일본어로 말하기를 즐긴다는 흥미로운 디테일을 부여받는 등 그 나름으로 공들여 구축한 인물이고, 그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노력하는 모습도 자세히 묘사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압도적인 분위기로만 존재하지 않게 되고, 우리는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에 끊임없이 대처해야 하며 그 과정이 항상 매끄러울 수는 없는 (아마도 좀더 실상에 부합하는) 권력의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심지어 이 재벌가의 딸은 질투에 눈멀어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위태롭게 하는 복수 행각을 기도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내부자들」 같은 영화를 연거푸 보면서 무소불위의 절대악에 대한 재현이 공분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비밀의 숲」은 선악의 경계를 긋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무력함에서 위로를 찾을 수 없도록 설사 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에 일조하지 않았는지 책임을 묻는다.

 

만약 우리의 책임이 크다면 역설적이지만 희망을 일구는 것도 우리의 몫이 된다. 그러나 우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근래에 나온 인상적인 한국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상호의 「서울역」(2016)이나 김성수의 「아수라」(2016)를 보면 한국사회는 이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유일한 존재방식이 되어버렸고 이 지옥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모두가 공멸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런 종말의 순간을 고대하는 정서마저도 감지된다. 「비밀의 숲」에서도 이런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인물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지만, 전반적인 극의 전개방식이야말로 폭발의 임계점을 향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내부압력을 효과적으로 극화한다. 이 드라마는 범죄수사물임에도 불구하고 16부작까지 이어지는 동안 (비교적 간단히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세번째 살인사건을 제외하면) 본격적으로는 고작 1건의 살인사건과 1건의 살인미수 사건을 다룰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추리의 치밀함이나 반전의 설계가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실제 미제사건에 바탕한 OCN의 「특수사건 전담반 TEN」 같은 이 장르의 선구적인 작품에 견주면 표준적인 장르적 재미는 떨어진다. 대신 「비밀의 숲」이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전략은 용의자의 범위를 계속 확장해가는 것인데, 최초의 살인사건이 검찰청 수뢰 사건과 관련되었기에 용의자는 주되게는 수사를 진행하는 주인공의 지근거리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포함하게 된다. 바로 “설계된 진실, 모두가 동기를 가진 용의자다”라는 이 드라마의 메인 카피가 예고하는 바이다. 그래서 모든 이가 서로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며, 모든 말과 행동은 짐짓 사소하게 보이더라도 실상 의미심장한 단서거나 상대방의 의중을 캐는 미끼가 된다. 그래서 주인공이 일하는 검찰청 공간은 『햄릿』의 덴마크 왕궁이 연상되는, 무언가 심각하게 어긋나버린 세계의 축도로서 기능하게 된다. 오죽 음모의 분위기가 팽배했으면 한동안 이 드라마의 열혈 팬들 사이에서 바로 주인공이 범인이라는 추정이 유력한 결론으로 회자될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비밀의 숲’의 모습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유혈 낭자한 과격한 폭력장면들만큼이나 한국사회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드라마의 몸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서울역」이나 「아수라」와는 달리 어떤 내부폭발의 장면을 마련하는 대신 진지하게 ‘비밀의 숲’에 길을 내고 어둠을 걷어낼 방법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정의를 구현해줄 우리의 대표 대리인에 대한 이 작품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현실적이지만 그만큼 깊은 비관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진실을 파헤치는 일에 매진하는 주인공을 상상하자면 뇌수술 받고 감정을 통째로 덜어내는 정도의 설정은 필수가 되었다. 비슷한 장르에 속하고 좀더 감상적이었던 「시그널」 같은 작품에서는 예외적인 주인공을 지금보다 순수했었다고 기억하고픈 과거에서 불러냈다면, 이제는 일종의 기계가 되지 않고서야 (특히 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사적인 동기에 지배받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주인공이야말로 철저하게 우리 시대의 그런 보편적인 합리성에 근거해 상황을 판단하며, 검사로서 그의 탁월성은 그 점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그러나 그밖에도 이런 설정이 황시목에게 부여하는 각별한 자질들, 예컨대 협박에 동요하지 않는 평정심 등에 찬탄하면서도 최종적으로 이 인물은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황시목 검사는 상당히 과격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그 상상을 거쳐 나온 자질조합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그의 강렬한 소명의식은 아무래도 직업적인 성실성이나 순수한 지적 만족감 차원에서는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 이창준(유재명 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황시목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판 연극을 설계한 연출자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가 그를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인물 또한 굉장히 비현실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황시목보다 더 그렇다. 어쩌면 이 16부작 드라마가 전체가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을 유서 내레이션 장면에서 이창준은 “우리 사회가 (…) 모른 척 할 정도로만 썩”은 것을 넘어서며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의 제물”로 삼는다고 밝힌다. 그는 여기서 공동의 삶의 감각을 너무나 깊이 체화하고 있어서 공동체의 운명을 곧 자신의 것으로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마음은 이 드라마가 상정하는 세계에서는 감정이 제거된 상태 못지않게 희귀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세계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변화는 제대로 극화될 수 없고 드라마 내내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통해 내면의 갈등 정도가 암시될 뿐이다. 공동의 삶의 감각을 역설하면서도 영웅주의에 호소하는 모순이 두드러지는 그는, 말하자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자기희생을 결의하는 이런 희귀한 유형의 인물이 대중문화에 등장한 것 자체가 뜻깊은 현상이며, 이런 현상이 더 나은 공통의 미래에 대한 과감하고 열띤 논의를 예고하는 상징이기를 기대해본다.

 

이정진 / 서울대 강사
2017.9.27.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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