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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윌슨』을 ‘고전’이라고 말하는 이유

유희석

윌슨우리 독자 가운데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톰 쏘여의 모험』(1876)을 모르는 이는 없지 싶다. 대표작인『허클베리 핀의 모험』(1885)도 덩달아 ‘청소년문학’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트웨인의 대중적 인지도는 19세기 서구의 어떤 작가 못지않다. 그의 성가(聲價)는 미국의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로 더 높아진 면도 있다. 하지만 타고난 흥행사적 기질도 한몫한 트웨인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Pudd’nhead Wilson(1894)을 접해본 독자는 극소수일 것이다. 최근에 김명환 교수의 초역으로 ‘얼간이 윌슨’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는데, 반가웠다. 『얼간이 윌슨』(창비 2014)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더불어 그 시대의 ‘고전’이라고―따라서 우리 시대에서도 필독서라고―단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고전’으로 불릴 만한 마크 트웨인의 숨은 걸작

 

이렇듯 『얼간이 윌슨』이 고전이라면, 이 작품이, 흑백의 우열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내재화한 노예제가 인간의 의식에 뿌리내려 온갖 종류의 비인간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양상을 감탄스러울 정도로 집약적으로, 추호의 감상(感傷) 없이 드러냈다는 점부터 강조할 만하다. 물론 감상이 배제된 드러냄의 성격은 전혀 간단치 않다. 『얼간이 윌슨』이 노예제를 비판하는 이야기임은 누구나 실감하지만 유념할 점은, 그것이 ‘작품으로서의 비판’이라는 사실이다. 흑백 전체를 포로로 잡고 있는 노예제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로서의 제도인가를 ‘추리소설적 재미’로 실감케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근절되지 않은 인종주의도 심문하고 있다면 그 비판의 성격은 간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남부 노예제의 잔학상에 대한 고발로 치자면 『엉클 톰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 1852)만큼 생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스토우(H. B. Stowe)의 이 장편은 남부 흑인들의 구체적인 실상을 기독교적 인류애라는 보편주의로 얼버무린 면이 있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래서 노예제의 불의에 대한 민중의 경각심을 더 강하게 일깨우기도 했다. 『얼간이 윌슨』에는 엉클 톰을 예수로 승화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이 일체 없다. 바꿔 말해 노예제도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망가뜨리고 병들게 할 수 있는가를 파고드는 상상력이 『엉클 톰의 오두막집』에는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얼간이 윌슨』의 아래와 같은 의문도 찾아보기 어렵다.

 

“도대체 왜 깜둥이들과 백인들이 만들어졌을까? 하느님이 창조한 것도 아닌 최초의 깜둥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기에 출생의 저주가 그에게 내린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끔찍한 차이가 백인과 흑인 사이에 만들어졌나?”(102면)

 

주인과 노예의 뒤바뀐 운명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깜둥이’임을 알게 된 발레 드 샹브르의 대사다. 즉, 1/16의 흑인 피로 인해 노예가 된 록시가 ‘엄마’임을 그에게 밝히고 난 이튿날의 독백이다. 가내(家內) 노예인 자기 아기가 커서 ‘강 아래’의 혹독한 대농장으로 팔려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주인집 아기(톰 드리스컬)와 바꿔치기 한 그녀의 ‘팔자’는 자식만큼이나 기구하다. 이제 주인이 된 아기가 ‘동부 물’을 먹은 사이비 신사로 성장해 방탕한 생활과 도박 끝에 유산을 상속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엄마는 노름빚을 갚아주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매물로 내놓는다. 자식이 그런 엄마를 ‘북쪽 농장’으로 보내준다고 속여서 바로 그 대농장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노예농장에서 도망쳐 아들을 찾아와 자기를 되사줄 것을 협박하는 어미나,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사랑으로 키워준 은인을 살해하게 되는 자식은 모두 노예제의 톱니바퀴에 끼어 으스러지는 노예들의 삶을 극화한다.

 

주인과 노예를 바꿔치기 한 록시의 꾀와 은인을 죽이고 다른 이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톰의 계략은 데이비드 윌슨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난다. 그는 동부의 법대 출신으로 도슨스랜딩의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농담을 하다가 ‘얼간이’라는 별명을 얻는데, 작품의 ‘도덕적 중심’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중심의 역할은 참으로 아이러닉하다. 정의의 가차없는 실현이 노예제 질서의 온존으로 이어진다면 그렇지 않겠는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톰 드리스컬이 살인죄를 벗는 대목만 봐도 그렇다. 그 판결은 철저하게 노예제의 경제논리에 근거한다. 즉, 퍼시 드리스컬 가문의 재산목록에 속한 노예가 뒤바뀌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는 동산(動産)으로서, 드리스컬 판사를 살해할 수 없었으리라는 추론이다. “따라서 정말로 살인을 저지른 죄는 그에게 있지 않고 오류가 난 재산목록에 있다”(251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인혐의를 벗고 동산으로서의 노예가 되어 어미가 막고자 했던 바로 그 운명을 맞는 발레 드 샹브르, 원래 자리를 되찾았지만 노예근성이 골수에 스며들어 앞으로 전혀 주인행세를 할 수 없게 된 톰 드리스컬, 생의 모든 의욕이 꺾이고 교회에 몸을 의탁해버린 록시는 뒤죽박죽된 노예제의 질서가 ‘얼간이’ 윌슨의 과학적 수사(搜査)를 통해 어떻게 복원되는가를 섬뜩할 정도로 냉철하게 증언한다.

 

따라서 노예제로 인해 발생한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음에도 노예제의 현실적 타개책에 관한 한 윌슨은 아무것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윌슨, 더 나아가 작가에게 대안을 다그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작가는 좋은 작품으로써 독자의 관성적인 생각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하고, 그로써 독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면 그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평가하는 게 맞다. 『얼간이 윌슨』이 바로 그런 것처럼. 과학적인 지문연구로 살인자를 밝혀내고, 뒤바뀐 주인과 노예의 자리를 바로잡으면서 자리가 그렇게 바뀐 이유까지도 추론해내는 윌슨의 범적 심판은 물론이고, 그런 윌슨에 환호하는 도슨스랜딩 주민들과도 착잡한 거리를 두는 독자라면 노예제라는 것이 무엇이고, 노예근성은 또 무엇인가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여전한 인종주의의 병폐 앞에서

 

물론 그 점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들은 흑인이었다. 당대의 흑인 노예서사가 노예제의 참혹한 현실을 폭로하면서 각성한 흑인의 상을 제시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훌륭한 문학적 성과도 적잖이 나왔다. 반면에 노예해방 이후 국면에서 활동한 백인작가로서의 트웨인이 작품으로 비판한 것은 노예제 자체라기보다는 흑백을 모두 얽어맨 그 이데올로기적 후과(後果)였다. 노예제가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로서의 제도”라면 『얼간이 윌슨』이 출간된 당시 그 제도는 이미 과거지사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종주의적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노예제 같은 과거도 온갖 방식으로 변형되어 되살아나는 법이고, 실제로 노예제의 알리바이로 작동한 인종주의의 허위의식은 흑인노예가 법적으로 해방된 재건기 국면(1865~77년)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악성화되고 뒤틀린 상태였다.

 

사법적 정의를 실현했으되 만악(萬惡)의 근원인 노예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윌슨의 아이러니도 그같은 시대적 맥락에 놓으면 사뭇 날카로워진다. 제도적 철폐로써 해소하지 못한 인종주의의 끈질긴 병폐는 그 맥락에서 좀더 분명해지는바, ‘얼간이’라는 윌슨의 별명도 한번 더 비틀어 그 아이러니의 일부로 해석할 때 비로소 통렬한 반(反)시대적 울림을 갖는다는 것이다. 『얼간이 윌슨』이 오늘의 문학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울림 속에서인데,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의 제목이 ‘얼간의 윌슨의 비극’이었다는 점도 우리와 동시대인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시대인식을 암시한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거쳐 인권이 보편화됐다고들 하는 세계화시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의 내면에 뿌리내린 인종주의적 편견이 온전히 근절되지 않았다면 『얼간이 윌슨』을 고전으로 읽고 평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유희석 /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학과 교수

2014.7.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