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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대통령의 플롯

손홍규
손홍규

손홍규

소설은 인간의 형식이다. 우리의 삶에 감추어진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듯이 소설에도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이 드러나는 방식이 있다. 나는 이걸 소설의 플롯이라고 부른다. 잘 알려진 E. M. 포스터의 정의를 먼저 인용해보자. 그는 플롯을 ‘인과관계를 강조하는 사건의 서술’이라고 정의했다.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 이건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왕비가 죽었다. 죽은 이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건 정교한 형태의 플롯이다. 이처럼 잘 알려진 정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포스터가 플롯을 극도로 혐오했다는 점이다. 그는 플롯을 정의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플롯이란 건 아예 가마솥에 넣어버려라. 부수어 끓여버려라. 이미 짜진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가 이처럼 플롯을 학대라 해도 좋을 만큼 혐오한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에는 새롭고 낯선 근대적 감성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의 플롯 혐오 역시 플롯에 의지하지 않는 새롭고 낯선 감성에 바탕을 둔 소설이 있기에 가능했다. 예를 들어 보까치오의 『데까메론』에 수록된 많은 에피소드들 그리고 모빠쌍의 「목걸이」와 같은 단편을 비롯하여 오 헨리의 대부분의 단편들은 플롯에 과도하게 의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적이라 해도 좋을 인과관계가 있고 비밀은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면으로 숨어든 현대소설의 플롯

 

그러나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생존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등은 더이상 플롯에 의존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말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라 불리는 안똔 체홉은 포스터가 정의한 플롯과는 전혀 무관한 소설을 썼다. 체홉의 단편 「자고 싶다」에는 하루종일 쉴 틈 없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해야 하는 어린 하녀가 등장한다. 하녀는 늘 잠이 부족하다. 조금이나마 틈이 생기면 어디서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다. 이번에 하녀에게 주어진 일은 요람의 아기를 재우는 것이다. 하녀는 요람을 흔들며 아기가 어서 잠들기를 바란다. 그러면 잠시라도 짬을 내어 잘 수 있을 테니까. 하녀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진다. 잠들기는커녕 더욱 큰소리로 울어대는 아기에게 증오심이 생긴다. 하녀는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면서 평화로운 수면을 방해하는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인다. 이 소설은 인과관계를 강조했다기보다 일어난 사건 그대로를 보여준 것처럼 여겨진다. 가공되고 미리 짜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발생한 사건을 눈앞에 보여준 것만 같다. 인위적이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가공되고 짜여진 어떤 이야기보다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소설은 체홉을 계승했다. 현대소설은 플롯과 무관하며 포스터가 혐오한 것만큼이나 플롯을 혐오한다.

 

편혜영의 단편 「야행(夜行)」의 인물은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긴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노인이다. 이미 철거가 시작된 아파트에 홀로 남은 늙고 병든 여인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아파트의 5층이다. 노인은 간단하게 짐을 꾸려놓고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오지만 아들이 아니다. 낯선 이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간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온다. 다시 현관문이 열린다. 누군가 주저없이 성큼성큼 들어선다. 이 소설의 서술방식 역시 인과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체홉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롯은 사라졌으나 어떤 소설보다 더 끔찍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에 주저없이 들어서는 자가 아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자가 누구인지 또한 중요하지 않다. 그런 비밀을 폭로하는 게 이 소설의 미학적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안똔 체홉 이후로 소설에서 플롯은 완벽하게 추방되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대소설에도 플롯은 있지만 이제 플롯은 작품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갔다. 플롯이 표면에 남은 유일한 경우는 통속소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작품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간 플롯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강조하는 대신 인물 감정의 구성을 강조한다.

 

「야행夜行」의 인물로 돌아가보자. 노인은 상황을 인지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소설에 흐르는 괴기스러움도 커진다. 노인은 상황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나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은 남편과 유아기를 막 벗어난 아들이 함께 찍힌 사진이 든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거기에 노인의 생이 담겼다. 노인은 어쩌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흘러간 생을 마주하는 것이며, 지나온 생 모두가 헛된 신념에 바쳐진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업에서 실패하여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아들에게 스스로를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노인의 존재조건도 중요하지만 스스로가 처한 상황이 아이러니임을 인식하는 자포자기한 듯한 행위 역시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인물의 내면이라 해도 좋을 소설의 내부에 있는 감정의 흐름이 플롯을 형성한다. 그리고 현대소설의 의미는 이 내면의 플롯을 통해 생성된다.

 

대통령의 표면과 교황의 내면, 그리고…

 

지난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참사와 관련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도중 눈물을 보였다. 이 장면을 목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눈물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리라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의 진정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있었고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진실은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진실은 없다.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도중 눈물을 흘린 대통령이라는 현상만 존재할 뿐 거기에는 감추어진 의미나 진실이라는 건 없다. 플롯은 존재한다. 어느날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으나 세월호참사에 깊은 유감을 느껴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현상의 표면에 명백하게 새겨진 플롯. 다시 말해 대통령의 눈물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묻는 건 쓸모없다는 뜻이다. 너무 공공연한 비밀이기에 처음부터 비밀일 수가 없는 비밀이다.

 

그리고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동안 프란 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교황은 광화문 앞에서 시복미사를 집전하고 성지를 비롯해 한국 가톨릭 관련 시설을 방문했다. 명동성당 미사를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났다.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라면 당연히 선택할 법한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교황의 플롯도 선명하다. 한국 가톨릭을 격려하고 신자들을 비롯해 한국 국민에게 교황의 위엄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일정은 짜였다. 그러나 교황의 플롯에는 표면에 드러난 플롯 이외에 내면의 플롯이 중첩된다. 그이가 차를 세우고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거나 그들이 전한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거나 가슴에 가볍게 손을 올리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것과는 달리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직접적이고 날선 언급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 교황의 내면의 플롯이 추구하는 미학적 목표가 있다. 우리는 교황이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다는 사실을 교황도 잘 알았다. 만약 교황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세월호특별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강력하게 요구했다면 표면의 플롯은 완성했겠지만 내면의 플롯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황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흐름은 그러한 언급을 향해 치달아갔을 테지만 바로 그 절정상태에서 새로운 하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대신 이 감정구조는 교황을 바라보는/읽는 이들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여기에서 바로 어떤 의미가 생성된다. 현대소설이 내면의 플롯을 통해 의미화를 이루듯이.

 

이 의미는 각자의 몫이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쓴 한편의 통속소설이 아니라 교황이 쓴 한편의 예술적인 소설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인다. 세월호는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가 절감하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해결책은 결코 온전한 해법일 수 없다. 필요하다면 정권을 무너뜨려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 모든 행위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위로를 받았다면 이제 질문을 던져라. 그 질문은 위로받기 전에도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

 

 

손홍규 / 소설가

2014.8.2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