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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의 양심고백과 과거사 극복의 어려움

임홍배

임홍배 |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지난 8월 11일 귄터 그라스가 자전소설 《양파껍질을 벗기며》의 출간을 앞두고 2차대전 말기에 나찌친위대(SS) 전투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 이후 독일 여론이 들끓고 있다. 알다시피 그라스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해왔고, 중요한 사안마다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작가인만큼 그의 입장에 공감하는 독자들에겐 살아 있는 양심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런데 그가 악명높은 나찌친위대에 복무했으며 더구나 그 전력을 60년 넘게 숨겨왔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논란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나찌친위대에 복무하게 된 경위와 동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동안 숨겨오다가 이제야 털어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터뷰와 자전소설에서 밝힌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라스는 15세에–전후 영화로도 유명해진–독일군 잠수함 부대에 지원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잠수함 부대는 더이상 충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차부대 대기자 명단에 등록되었다가 2년 후 징집통지서를 받고 나찌친위대에 배속된다. 사실경과로 보면 나찌친위대에 자원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자전소설의 묘사를 보면 나찌친위대에 배속된 사실을 집결지에서 처음 인지했을 때 ‘엘리뜨부대’라 생각되어 우쭐했다고 한다. 더구나 그가 배속된 부대에는 ‘볼셰비끼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심지어 중립국 스웨덴’ 출신의 ‘자원병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유럽을 대표하는’ 부대의 인상까지 받았다고 쓰고 있다. 비독일 출신의 ‘자원병’ 이야기는 도무지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만, 어떻든 17세까지는 나찌친위대의 만행을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과는 미묘하게 대조되면서도 합치되는 대목이 있다. 징집되기 전까지 그라스는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후방 군부대의 작업인력으로 동원되어 군사훈련도 받고 있었는데, 학생 중 한명이 ‘우리는 이런 짓은 안한다’며 군사훈련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자 그라스와 동료학생들은 그 친구가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을’ 거라고 수근거리면서 ‘슈트호프’라는 강제수용소 이름까지 댄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를 ‘연주회장'(Konzertlager)이라고 부르며 말장난까지 한다. 그라스 자신은 군사훈련을 거부하던 친구가 사라지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독일인들이 왜 유대인들을 심하게 다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가가 되고 싶어 그 시절에 보았던 그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민감한 감수성의 소년이 강제수용소의 실체를 몰랐을까? 절반의 대답은 작품에 들어 있다. 죽음의 전쟁터에 자원한 15세 소년의 혼란스러운 의식상태가 그것이다. 작품에 따르면 당시 이 소년은 중세의 농민봉기 지도자들을 우상처럼 섬기는 동시에 히틀러를 ‘하늘이 내리신 영도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전차부대 대기자 명단에 올랐을 때는 ‘롬멜의 전차군단’을 떠올리며 들떴다고 한다. 나찌친위대 마크를 보고 ‘엘리뜨부대’라고 우쭐했다는 것과 부합하는 대목이다.

인터뷰에서 그라스는 왜 15세의 나이에 전쟁터에 자원했느냐는 질문에 ‘답답한 집안 분위기에서 뛰쳐나오고 싶어서’라고 대답했고, 작품에서는 ‘빨리 사내대장부가 되어 싶어서였을까?’라고 자문하고 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욕구가 과연 죽음의 공포를 압도할 만큼 절박했을까? 사춘기 소년의 이 불가해한 의식상태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라스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 전쟁말기의 참상을 겪은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 몸젠(H. Mommsen)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붕괴되는 전시상황에서 누구나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소년 그라스의 ‘도덕적 파탄’을 해명하고 있다.

어떻든 소년 그라스가 나찌 지지자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찌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친위대 배속에 들떠한 태도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만약 그라스가 배속되었던 부대가 동부전선의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다른 ‘임무’를 맡았더라면 그라스 역시 민간인과 유대인 학살자가 되어 손에 피를 묻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문학사에 귄터 그라스라는 이름을 올리기는커녕 평생 자기 이름을 숨기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양철북》의 작가가 독자의 이런 상상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다시 말해 《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 이 시절에 대한 묘사에는 작가 자신도 뭐라고 해명할 수 없을 만큼 ‘자서전’과 ‘픽션’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자서전’의 관점에서 보면 그라스의 이 고백이 과연 전기적 사실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변명으로 기우느냐 하는 문제가 논란의 촛점이 되며, 아직까지도 독일언론의 관심은 이 측면에 쏠려 있다.

그러나 ‘픽션’의 관점에서 보면 그라스는 자신의 소년기 체험을 들춰내어 나찌시대에서 살아남은 독일인들의 ‘공동의 책임’ 문제를 다시 도발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누가 보아도 황당한 변명이라고 판단할 구절들을 일부러 삽입한 것은 전기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허구적 연출’인 것이다. 요컨대 한 평범한 소년이 이 자전소설에서 묘사되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전쟁터에 자원하고, 나찌친위대에 배속되어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공범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치부를 소설의 재료로 삼아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작품 자체로 ‘소설가’ 그라스의 작가적 양심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강제수용소의 고문기술자들과 학살자들은 전쟁 전에는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 혹은 엘리뜨 의사들이었다. 그들이 과연 어떤 연유에서 잔혹한 학살자로 돌변했을까? 이 의문은 전범재판 같은 방식의 ‘과거사 청산’만으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나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 체험이든 역사적 체험이든 한 인간의 삶에서 어두운 기억의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경험의 실체는 결코 말끔히 ‘청산’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청산’은 ‘망각’의 계기로 악용되기 쉽다. 이딸리아의 철학자 아감벤(G. Agamben)이 아우슈비츠 문제를 다루면서 말했듯이 ‘스피노자의 의식상태보다 더 파악하기 힘든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상태’다. 그런데 그 평범한 사람들의 행적은 역사에서 기록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입법과 제도로만 청산된 역사적 과거는 현재를 사는 개개인이 결코 소통할 수 없는 역사의 각질이 아닐까?

60년간의 침묵 끝에 고백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라스는 작품에서 짤막하게 해명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멍청한 오기로 저지른 일에 대해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점점 커지는 수치심 때문에 덮어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마음의 부담은 덜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이 부담을 덜어주지 못했다.” 그라스는 인터뷰에서도 ‘이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이상의 해명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쪽에서는 일찍부터 노벨상을 염두에 두고 ‘경력관리’ 차원에서 침묵했다거나, 자서전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현싯점을 택했다거나 하는 선정적인 비난이 거세다.

하긴 언론보도에 따르면 초판 15만부가 일주일 만에 매진되었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나 역시 서점에 책이 동이 나서 주문한 다음날 책을 받았다. 독일의 가장 부유한 문화도시 뮌헨의 대학가 서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가 하면 2차대전 종전 후 폴란드에서 쫓겨난 독일인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기독민주연합(CDU) 소속의 어떤 정치인은 그라스가 ‘화해의 제스처’로 자서전 판매수익금을 나찌치하의 폴란드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헌납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제스처’야말로 나찌세력에 짓밟힌 폴란드인들에 대한 이중의 모욕일 것이며, 폴란드 태생의 그라스로서는 지금의 양심고백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사태일 것이다.

어떻든 소년시절의 잘못 자체보다는 60년 동안이나 치부를 숨겨왔다는 사실로 인해 그라스는 그가 수십년간 완강하게 고수해온 정치적 입장의 도덕적 기반에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털어내지 못한 죄책감이 이번 고백으로 쉽게 덜어지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귄터 그라스 역시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장기에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일찍부터 ‘참여작가’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며, 어떻게든 수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더욱 전투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팔순잔치 이후에(그라스는 올해 79세다) 혹은 사후에 그러한 전력이 밝혀지는 것보다는 지금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모양새가 덜 나쁠 거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그라스의 뒤늦은 고백에 대한 공방을 가열시키는 요인의 하나는 훌륭한 작가가 곧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일 거라는 환상이다. 그라스보다 한 살 위이고 두 해 먼저 노벨상을 받은 이딸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D. Fo) 역시 전쟁 말기에 무쏠리니 친위대에 자원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물론 그는 작가 초년시절에 일찌감치 고백했고, 또 전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가 2주 만에 탈영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었다고 솔직히 동기를 밝혔다. 반면 그라스는 인터뷰에서 ’60년 동안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지 못한 부담 때문에 이 자전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동안의 침묵에 대해서도 이 작품을 읽고 더 생각해보자는 우회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향도시인 폴란드의 그단스크 시민들에게는 공개서한으로 공식사과를 했지만, 독일독자들에게는 일체의 사과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일회성의 공식사과로는 그동안의 침묵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태어나서 자란 폴란드가 역사적으로 독일에 유린당했고, 자신이 사춘기에 저지른 과오 역시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빚어진 ‘희생’의 사례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일까? 기묘하게도 독일의 언론은 그라스가 독일독자들에게 공식사과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이런 대목 역시 그의 자전소설 텍스트에 못지 않게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독일 예술원장은 공식석상에서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비밀은 무덤 속으로 가져갈 일이지’라며 웃지 못할 농담을 했다. 그러나 그라스가 뒤늦게라도 양심고백을 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그리고 이로써 영웅적 투사의 이미지를 해체할 계기를 스스로 마련한 것도 잘된 일이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데 굳이 영웅이 필요 없는 좋은 세상이 오면 독자들은 작가 그라스의 영광과 인간 그라스의 영욕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을 통해 나찌 과거사의 극복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다시금 생각할 계기를 제공한 것도 이번 사태를 단지 노벨상 작가의 스캔들로만 보지 않으려는 사려깊은 독자를 위해서는 전화위복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2006.09.05 ⓒ 임홍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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