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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 외 『분배냐, 인정이냐?』

김항

현재진행형의 비판이론과 현대사회의 절박한 과제
– 낸씨 프레이져‧악셀 호네트 『분배냐, 인정이냐?』, 사월의책 2014

 

 

boonbae1922년, 독일의 젊은 유대인 맑스주의자 펠릭스 바일(Felix Weil)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제1차 마르크스주의 연구회’(Erste Marxistische Arbeitswoche)를 개최한다. 이 회의에는 루카치(G. Lukács), 코르쉬(K. Korsch), 비트포겔(K. A. Wittfogel) 등 당대의 젊은 맑스주의 계열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유럽 대학에서 최초로 맑스주의를 학술적으로 논의하는 장이 된다. 이 모임이 성공리에 마무리된 것을 보고 바일은 부유한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지원을 얻어 프랑크푸르트대학에 맑스주의 연구조직을 영구적으로 세우게 되는데, 그것은 빈대학의 교수이자 맑스주의자였던 칼 그륀베르크(Carl Grünberg)를 초대 소장으로 초빙하여 1923년에 건립된 ‘사회조사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였다. 유럽 대학 내에 최초로 ‘좌파’ 계열 연구소가 공식적인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연구소가 이른바 ‘비판이론’의 메카로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특히 1927년부터 실질적으로 연구소의 책임을 맡게 된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당시의 유럽 대학 기구로는 파격적일 만큼 다양한 전공영역의 젊은 연구자들을 초빙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후대에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알려질 이 연구그룹은 20세기의 비판적 학제간 연구를 선취하는 성과를 산출했고, ‘비판이론’이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통용되게끔 만드는 저력을 과시했다.

 

1937년에 발표된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이란 호르크하이머의 논문은 기존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규범과학이야말로 비판이론의 임무라고 못 박았다. 이러한 호르크하이머의 정식화는 거의 한세기를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하고 실행 중에 있다. 『분배냐, 인정이냐?』는 그런 비판이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판이론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책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낸씨 프레이저(Nancy Fraser)와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의 대표주자로 지칭되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논쟁을 담은 것이다. 하버마스(J. Habermas)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과 교수로 있는 호네트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프레이저 또한 비판이론의 계승자임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교편을 잡고 있는 ‘뉴스쿨’(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이 20세기초 뉴욕의 급진적 사회학자들이 창설한 것이고, 193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한 유럽에서 온 망명 지식인들의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사회조사연구소가 1930년대에 제네바에서 뉴욕으로 옮겨져 명맥을 유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판이론의 역사에서 볼 때 뉴욕과 뉴스쿨은 프랑크푸르트 못지않은 상징적 장소이자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런 호네트와 프레이져의 논쟁을 담은 작품이기에 『분배냐, 인정이냐?』는 서구와 미국의 비판이론이 현재 어떤 논점을 두고 사유를 전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책이다.

 

400면에 달하는 분량을 통해 두 사람이 벌이는 논전은 사실 매우 간단명료한 논점을 둘러싸고 이뤄진다. 그 논점이란 현재의 사회적 불의를 해소하기 위한 비판이론의 규범적 준거점이 분배냐 인정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프레이저는 자신이 “관점적 이원론”이라 부른 입장으로 답한다. 그녀에 따르면 냉전 종식 이후 서구의 비판이론은 계급정치에서 ‘정체성 정치’로 이행함에 따라 분배문제에 소홀히 대처해왔다. 다문화주의로 통칭되는 문화론적 흐름이 지성계와 사회운동을 지배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 호네트나 찰스 테일러(Charles M. Taylor)가 주장하는 ‘인정’론이라 비판한다. 호네트가 사회적 불의의 근원을,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무시와 모멸의 경험을 겪는 데서 찾은 나머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레이저는 인정과 분배는 서로 환원 불가능한 규범적 기초이며, 분배를 통한 인정과 인정을 통한 분배라는 실천적 관점 및 전략을 통해 사회적 불의를 시정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네트는 이에 응수하면서 프레이저가 미국의 경험을 과도하게 일반화한 나머지 자신의 인정론을 오독했다고 반비판한다. 냉전 종식 이후 서구의 사회운동과 비판이론이 계급정치에서 정체성 정치로 이행했다는 프레이저의 연대기는 주로 미국 사회운동의 흐름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며, 자신의 인정론은 그러한 한정적이고 피상적인 사회운동의 연대기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자신이 인정론을 주장한 까닭은 “현재의 정치적 요구를 비판적 사회이론의 틀 속에서 일관되게 재구성하고, 또한 규범적으로 정당화하는” “철학적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였지, 1960년대 이래 부상했고 냉전 종식 후 지배적이 된 다문화주의나 정체성 정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호네트의 이론적 동기는 분배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인정 개념이 비판적 사회이론의 단일한 규범적 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 셈이다. 그가 이렇게 인정 개념을 사회적 불의를 비판하기 위한 근원적 규범으로 삼는 까닭은 기존의 비판이론이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 모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주체의 행위와 판단이 언제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적 정당성을 따져 물으면서 이뤄짐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그러한 규범적 정당성이 훼손됐을 때 무시와 모욕의 경험을 겪게 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무시와 모욕의 경험이야말로 사회의 규범적 정당성이 훼손되었음을 알리는 징후인 셈이다. 이렇게 호네트는 인정 일원론을 프레이저의 이원론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논쟁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과제로

 

이런 논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두 사상가의 장황한 논쟁은 사실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똑같은 논점이 반복되고 서로의 오독을 확인하고 지적하기를 반복한다는 느낌이 짙다. 하지만 독서가 느슨해진다고 해서 논점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끈질기게 서로의 오류를 지적할 정도로 이 문제가 절박한 것임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왜 인정과 분배가 이토록 절박한 문제인 것일까? 그것은 프레이져의 말에 따르면, “박탈로 인한 상처에다가 경멸이라는 모욕을 덧붙이는” 현재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밀양에서 세월호까지 박탈과 경멸은 끝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할머니들은 보상금을 바라는 파렴치한 이기주의자로 경멸당하고, 터무니없는 국가 시스템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의 외침은 과욕의 소산으로 모욕을 경험한다. 이런 상황과 마주했을 때 프레이저와 호네트 중 누가 더 옳고 타당한가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인정과 분배가 근원적 규범으로 자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상황과 도덕적 원리를 창출하는 일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긴박한 과제임을 더할 나위 없는 끈기와 열정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2014.8.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