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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교육인가

조광희

조광희 / 영화제작자

이른바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겠다는 정부와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발상과 행동은 ‘퇴행적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금성출판사가 지구의 역사를 금성에 사는 외계인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도 아닌데 왜 이 난리인가? 이분들이 ‘실질적 민주주의’는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킬 생각도, 그것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식도 별로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분들이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이는 소란은 다시 한번 우리들의 예상을 넘어선다. 이분들이 보기에 왼편에 서 있는 우리들은(오른쪽 맨 끝에 서 있다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 왼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소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동체가 ‘집단적 기억’을 보존하고 해석하여 전달하는 과정은 결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 과정은 과거로 직접 여행해서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구성원 간에 상이한 지위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연유로 온갖 불일치와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역사인식’에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이고, 실제와 신화가 뒤엉키며, 진실과 허위가 뒤범벅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게 되면 오히려 ‘역사인식’은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된다.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하면 반드시 오류에 빠지지만, 자신이 오류의 구렁텅이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면 도리어 구원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겸손해진 ‘역사인식’은 특정한 ‘역사인식’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고 나아가 장려하게 된다. 그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잘 어우러질 때 우리는 역사의 멋진 합창을 들을 수 있고 그 합창의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역사가 우리에게 섬광처럼 허락하는 진정한 영감을 얻게 된다.

지금 역사교과서의 수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나는 그들의 입장과 인식이 맘에 들지 않지만 그것도 충분히 타인에게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눈뜬 장님처럼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눈감고 있다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웃어주면 그만이다. 혹시 그들이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눈감지 않고 있다면 비록 그들이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법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에 봉사하는 그들의 역사인식

그런데 나는 역사교과서 수정을 주장하는 이들의 ‘역사인식’에 내재한 가치관에서 몇가지 수상한 징조를 발견한다. 그들의 가치관에서는 전체주의가 느껴진다. 그것은 전체의 행복과 발전을 위하여 부분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정말 불가피한 경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주 그리고 수시로 그럴 수 있다는 발상이다. 또한 그들의 가치관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철저하게 뿌리내려 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나 인간의 역사에서 더러 보이는 실제 사건을 냉정하게 그대로 인식한 것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들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역사 전반에 부당하게 일반화해 가치판단의 토대로 삼는다. 나는 또 그들의 가치관에서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도 읽는다. 결과가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들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만들어진 현실 자체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전체주의’ ‘약육강식’ ‘결과중시’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의 공통된 핵심은 “강자의 기득권을 그 정당성과 무관하게 인정, 유지하고 그 발전을 미래에도 보장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인식’의 척추이며, 현재 한국에서 득세한 보수주의자들의 본질적 사고방식이다. 그들의 ‘역사인식’의 목표는 현재 이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신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고 그 주도권을 지키는 데 역사가 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적이라고 말하기에는 허황되고 철학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유치할지라도, 그것을 그저 표현하는 행위를 가로막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왜 어리석고, 그것이 왜 거짓인지 보여주면 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역사교육에 개입한다. 역사교육에 개입하더라도 규범과 상식에 따라 나름대로 역사를 기술하고 그것이 읽히도록 노력하면서 공정하게 남들과 경쟁하면 된다. 물론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들이 삶과 역사에서 배운 교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교과서로 채택될 만한 책을 쓸 자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왕 칼을 쥐고 있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려는 것인지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인식’을 이상한 방식으로 강요한다. 그러한 행태는 우리에겐 매우 낯설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행태는 그들의 ‘역사인식’의 토대가 되고 있는 가치관에서 동일하게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식과 행동에는 경탄할 만한 일관성이 있다.

설득하고 유혹할 뿐 강요할 수는 없다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역사인식’이란 우리가 추구할 수는 있으나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절벽 뒤편에 핀 꽃’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경쟁하는 ‘역사인식’ 중 어느 것이 실제로 우세한 시대정신이 될지는 그것이 사람들을 얼마나 설득하고 매료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역사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은 거의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혼란스럽고 촌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역사인식’마저도. 그러나 어떠한 ‘역사인식’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되며, 학생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나 과거로 사라진 어느 예술평론가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증거에 따르면 그 여자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유형의 경험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술은 체험하는 사람의 공모 없이는 유혹에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역사교육도 그 점에서는 예술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2008.12.10 ⓒ 조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