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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새로운 국가 디자인

이기호

이기호 | 평화포럼 사무총장

동북아시아는 아직 ‘상상의 공동체’이다. 지리적 범주로 본다면 여기에 속하는 국가들이 나열될 수 있겠지만 정치적·사회적 의미의 공동체로 본다면 이제 겨우 공동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한 불안정한 지역일 뿐이다. 현재 이 지역의 국가들은 동북아 공동의 미래는커녕 자국의 방향성과 관련하여 가파른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쳔슈이뼨 총통이 가족비리로 탄핵위기를 맞았다. 중국은 7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개혁개방과 선부론(先富論)에서 탈피, 농촌을 중시하고 균등배분을 강조하는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으로 국가목표를 조금씩 선회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는 9월이면 코이즈미 수상이 임기를 다하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것이다. 한국은 지난 5월말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이 참패를 당하고 한나라당이 압승을 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변화를 역사의 전환점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정치적 사건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변화의 핵심에는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국가공동체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중국으로부터의 확실한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의 ‘독립국가’, 평화헌법 9조를 바꾸어 군대를 보유하려는 일본의 ‘정상국가’, 분단을 극복하겠다는 한국의 ‘통일국가’는 모두 지금까지의 국가가 비정상국가였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각국이 꿈꾸는 정상국가는 모두 주변국가의 협력과 동의를 얻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외교적인 문제이며 동북아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국, 대만, 일본은 앞에서 열거한 불안정한 국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그어놓은 질서와 그 대부 격인 ‘미국’에 의지해 국가안보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각국이 꿈꾸는 이른바 ‘정상국가’는 더이상 미국의 후견에 의해서 유지되는 질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라는 또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교착국면에 봉착해 있지만 새로운 역사적 방향을 만들어내는 커다란 전환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대만의 독립이 홍콩이나 마카오와는 다른 식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중국 내 동서격차를 완화할 수 있도록 각 성(省)의 자립성을 한층 높이는 정치개혁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통일이 비핵화 및 군축으로 이어져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사실상 해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본이 바라는 ‘정상국가’가 헌법 9조의 변화 없이도 군사력이 아니라 평화에 기초한 안보에 바탕을 둔 것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면, ‘동북아시아 정치공동체’를 그려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환점이 방위분담을 이유로 미국이 일본의 군대보유를 사실상 유도하고, 미국의 대북 제재조치가 강화되어 불안정한 남북체제가 지속되며, 중국의 일국주의에 의해 대만해협의 긴장이 높아지는 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지 않는 식으로의 일본의 ‘정상국가’만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하고 이미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해석과 전망이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여전히 20세기의 경험에 짓눌린 국가주의적 사고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국가가 이미 시민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국가의 탄생이 민주화라는 근대의 유산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면, ‘정치공동체’로서 국가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먼저 동아시아 캘린더를 생각해보자. 당장 2007년은 한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있고 87년체제가 20주년을 맞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직선제를 목표로 한 1987년의 헌법이 대한민국의 최장수 헌법이 되었지만 이제 북한과 아시아를 염두에 둔 새로운 국가틀을 모색하기 위해 재논의해야 할 싯점인 것이다. 올 9월 내각이 교체될 일본은 이듬해 통일지방선거를 치른다. 우리 같은 역동적인 정권교체를 경험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지방에서의 변혁과 개혁이 중요한 실험이자 국가를 압박하고 포위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2008년이면 전세계의 이목이 뻬이징올림픽으로 몰릴 것이다. 또한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인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이기도 하며, 동북아질서에 깊이 관여해온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다. 대만 총통이 탄핵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서 동북아공동체의 미래를 공동의 아젠다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정치적 기회구조가 낙관적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국가의 근본틀에 대한 문제제기는 ‘동북아시아’라는 새로운 정치공동체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음이 명확하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전히 일국 차원에 매몰되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편승하고 있다. 국가가 동북아를 향해 활짝 열리도록 하는 일은 동북아 미래를 상상하고 토론하는 ‘동북아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2006.06.13 ⓒ 이기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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