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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협력과 비판적 지식인들

이남주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지난 6월 9-10일 창비와 세교연구소 주최로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의 연대와 잡지의 역할’이 열렸다. 참석자들 중에는 이미 서로 친숙한 사이도 많았는데, 잡지를 화두로 하는 만남에 다소 낯설어하면서도 흥미로운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잡지 편집자의 시각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단위가 진보적 실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들의 연대와 교류를 위해 어떤 활동이 가능한가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

냉전 이후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동아시아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견해들은 이미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그동안 동아시아 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의 연대와 협력을 당면한 실천과제로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필자는 중국대륙의 잡지를 대표해 참석한 왕후이 등에게 중국의 정부측 인사들은 최근 지역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는데 반해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서는 실천적 관심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데에는 동아시아에서 진보적 상상이 일국적 차원의 모델에 갇혀 있거나, 반대편향으로 지구적 차원의 보편모델에 경사되어 실천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이러한 접근으로는 동아시아라는 중범위적 지역단위가 진보적 실천과 맺는 관계를 포착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회의에 참가한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개별 국가에서의 실천과 동아시아라는 범주 사이의 관계를 주된 화두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연대’라는 토론주제 때문만이 아니라, 참석자들의 문제제기가 매우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몇가지 사례는 앞으로 동아시아의 연대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대만사회연구≫의 쳔이즁은 대만인의 정체성을 앞세우는 대만의 민족주의와 대일통(大一統)을 앞세우는 대륙의 민족주의는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양안은 하나의 중국에 속한다’라는 전제하에서 대만의 국제사회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의 화해와 지역통합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또한 오끼나와의『케시까지』(‘역풍’이라는 뜻)의 오까모또 유끼꼬는 오끼나와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소개하며 이를 동아시아의 탈식민·탈제국화의 시각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많은 참석자들은 오끼나와 문제와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지역을 넘어서 갖는 연대적 의미에 공감을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중국대륙의 참가자들도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실천적 연대의 필요성에 공감을 적극적으로 표시했다. ≪민간≫의 쥬졘깡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중국에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시민사회와 NGO들이 ‘평화’문제를 국가간 국제정치적 문제로만 이해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번 회의가 ‘평화’문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중국으로 돌아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논의가 향후 동아시아의 연대에 던져주는 시사점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적 과제가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에만 의존해서는 민족적 과제를 완수하기 어렵다는 데 공감했다. 최근 여러 사례에서 보듯, 각국 민족주의의 건강하지 못한 상호작용은 문제 해결보다는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 양안관계, 일본의 역사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평화,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협력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동아시아에서 미결로 남은 민족적 과제를 완수하기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가 패권주의에 오염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하더라도 연대의 실천적 방향에 대한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만의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쳔꽝싱은 동아시아의 주체성의 회복과 진보적 실천을 위해서는 탈제국의 과제를 전면에 내세울 것을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후의 과제로 미루어졌다.

다만 각국 비판적 잡지들이 콘텐츠를 교환하고 인터넷을 이용해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만들자는 합의는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실천적 함의를 찾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협력이 구체적인 공간을 매개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공동체의 발전을 두고 시장과 화폐의 통합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유럽통합의 비전을 공유하는 지식인들이 인식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창비 4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라 잡지의 역할이라는 화두가 제시됐지만 이것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비판적 지식인들의 연대와 협력을 요청하는 역사적 요구를 반영하는 우연 속의 필연이라고 느낀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2006.06.20 ⓒ 이남주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