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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작들을 기다리며

전성태

전성태 / 소설가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근작소설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은 만년작(晩年作)으로서 격이 있다. 살아 있는 작가에게 ‘만년’ 운운하기 면구스러우나 오오에 스스로도 이 장편들을 일컬어 ‘생애 마지막 3부작’이라 하였거니와, 작품 곳곳에서 토로한 만년작에 대한 의욕과 사유가 상당하다. 오오에는 오랜 벗 싸이드(Edward W. Said)의 저작 《후기 스타일에 관하여》(On Late Style)에 대한 평에서 “예술가의 만년의 작업이, 곧잘 이야기되는 원숙함이라든가 사회와의 조화와는 반대로, 개인으로서 끌어안고 있는 모순과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 파국)의 예감으로 부대끼는 가운데 기적과도 같이 달성된다고 하는 사실을 실증해나가는” 예라 하였다. 싸이드가 “만년이라는 것은 초월하기도 어렵고,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로지 심화시킬 뿐이다”라고 내린 정의를 오오에는 재차 인용하며 만년작에 대해 받은 깊은 영감을 전한다.
 
만년작은 물리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의 작품이 모두 만년작이 아니듯 그것은 예술가의 전생애를 짊어지면서도 한편으로 끊어내고 비약하는 속성도 지니는 듯싶다. 싸이드 저작에 대한 오오에의 평가 역시 미적이고 윤리적인 가치에서 만년작이 실현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김정환 시인이 던진 만년작에 대한 비유는 단연 멋지고 인상적이다.  

동굴벽화를 그리던 때부터 치면 예술의 나이가 수만년이잖아. 그런데 예술이 예술의 나이를 먹지 않고 인생의 나이만 먹잖아. 예술이 인생의 나이를 벗어나서 예술 자체의 나이를 먹는 것, 그것을 만년작이라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 (…) 만년작이라는 게 치매 속이거든. 치매라는 게 다른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간 개념도 별로 없고 옛날 사람도 되었다가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왔다가 그러잖아. 만년작이 그런 거 비슷한 거지.  —《대산문화》2008년 여름호

만년작이 치매 같은, 실상과 헛것, 체험과 상상,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의 뒤섞임 속에 존재한다면 오오에의 3부작은 명백히 그런 세계에 속한다. 세 작품 공히 저편에 있는 자(죽은 자 혹은 과거 인물)들과 대면을 시도할 뿐 아니라 자아가 분열하여 쟁투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육성을 채우기 위해 음악, 미술, 영화를 포함한 수많은 고전 텍스트가 수시로 불려나오며, 특히 그의 오랜 창작방법이긴 하나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인용·변주·비평이 더욱 노골화된 것은 이 3부작이 만년작으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만년의 역할,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을 장려하는 일

그런 가운데 이 소설의 전체적인 주조음은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어떤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오오에의 만년작들이 지니는 미적 긴장이다. 앞서 인용한 ‘개인으로서 끌어안은 모순과 카타스트로프’를 그대로 노출하는 일을 오오에는 미학적으로 수행한다. 그 자신 문학적 에너지를 초월이나 극복에 두지 않고 서로 모순되는 양극 사이의 긴장관계로써만 획득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지경을 그의 문장을 빌려 표현한다면 “무엇 하나 용서하지 않고, 하지만 더없이 깊은 자비로!”쯤 될 것이다.

그의 이런 미학적 접근은 아주 철저하다. 자신의 문장에 대한 비평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그는 난해, 악문, 이것이 일본어냐는 식의 비평을 받는 자기 문장에 대해서 교착어(膠着語)로서 일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의도를 밝히고 있다.(223면) 물론 그는 좋은 문체란 “묵독하는 가슴속에서 명쾌한 리듬의 음악이 솟아올라 단순하고 소박한 한 줄, 한 구절에 깊은 지혜가 읽히는, 그런 명문”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문장의 감옥에 쉬 갇히고 마는 작가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 오오에가 초기작의 미문들로부터 결별하여, 문장의 파탄까지 감수하면서 돌파하려 했던 그 미학적 도정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텍스트를 미묘한 부분까지 깊게 읽어내고 그 감상을 사유의 언어로 펼쳐놓은 대목들은 독립적인 에쎄이로도 손색이 없다. 가령 《체인지링》에서 〈마가복음〉의 예수 부활 대목에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의문과 적극적인 해석은 소설의 주제로 끌어올려진다.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에 불러다 놓은 텍스트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만년 3부작의 맛은 바로 이처럼 작가생활 50년의 고독한 시간이 길러낸 비밀스런 사색들이 도처에 풍성하다는 점이다. 이것들이 소설을 더욱 장편답게 한다.

그것은 성숙한 여성 성기와는 별개의, 좀더 광포할 만큼 그 자체인 무엇이다. 넓고 풍요롭게 젖어 있는 장소. 지금까지의 경험에 입각하여 이곳은 해부학적으로 이러이러한 부분이라고 말하려 해봤자 할 수가 없다. 펑퍼짐하게 넓고 엄청나게 젖어 있는 것이다. 건강한 욕망과 중첩되는, 강한 순결. 그 자체로서 독립해 있는, 젊은 아가씨의 성적인 유로(流露). 요컨대 쎅스를 향한 준비과정이라는 것이 아니다. ―《체인지링》 349면

쓰기와 읽기를 호흡처럼 해온 오오에가 자신의 삶과 문학을 총결산한 문장은 ‘회복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쉽게 파괴하고 훼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까스로 회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앞서 이 소설의 주조음을 공포와 절망이라고 했다. 작가가 심연으로 파고들어 만나는 한가닥 빛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성성’일 것이며, 이는 회복하는 인간의 실체이자 은유일 성싶다. 
 
한국문학에도 만년작의 축복이 가득하길

그러나 이런 미적 격렬함만으로 충분히 진정성을 얻을 수 있을까? 오오에의 소설들은 외양상 일본소설의 특징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을 띤다. 물론 그는 자신이 사소설의 전통을 어떻게 부정하고 극복했는지 따로 밝히고 있다. 어쨌든 그가 구현한 소설적 형식은 아주 위험스럽게도 작가 자체가 주요한 미학적 축이다. 작가의 윤리성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사회와 세계를 등진 채 그저 언어를 ‘갈고닦을’ 뿐인, 오따꾸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회와 세계에 자신을 들이밂으로써 내면에 뿌리박혀 있는 표현의 언어를 현실적인 것으로 연마하는 것입니다. ― 산문 〈언어의 일래버레이션〉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목소리는 열도에서 단연 또렷했다. 우리가 한국인이고 그가 일본인이라서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 게 아니라 그는 양심적 지성으로서 목소리를 또렷이 내왔다. 열살 때 패전을 경험한 그에게는 전후 60년간 일본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소설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어떻게 개인의 삶에 구체적인 폭력으로 작용하는지 형상화하는 데 진력했다.

소설가는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자식이라는 게 오오에의 생각이다. 오오에가 3부작에서 공포와 절망을 토로한 것은 일본인의 현재와 미래가 정말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만년의 소설가가 할 역할은 불안감과 상실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을 장려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의 후배 작가들이 저항문학으로서 자신의 만년작에 관심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그것이야말로 일본문학의 미래라고 믿는다.
 
비단 일본 작가들에게만 소용되는 희망은 아닐 것이다. 근래 작가로서 어떤 각오가 없으면 안되겠다고 고민하던 나로서도 오오에의 만년작들은 큰 축복이었다. 오오에의 소설들을 치운 자리에 이청준의 소설들을 쌓아놓고 다시 이상한 설렘에 들뜨는 건 우리의 어른들로부터 이런 축복이 쏟아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2009.3.4 ⓒ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