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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하나도 다치지 말아라

김선우

10년이나 어린 나의 후배에게

김선우 / 시인

백번째 촛불집회가 있던 날. 마감해야 하는 원고를 앞두고 아침부터 멀미하듯 마음이 울렁거렸다. 경찰은 강경진압을 공개적으로 예고한 상태. 그간의 경과를 보자면 최루액과 색소 섞은 물대포, 무차별 연행까지 진행될 것이 뻔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검증절차 없이도 ‘합법’이 된다. 백주의 폭력이 ‘공무집행’ ‘법집행’이 되는 합법의 수렁. 그간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두번이나 방패에 찍힌 적이 있는 후배가 나는 아침부터 걱정되었다. “어디? 괜찮니?” 문자메씨지를 보냈다. “괜찮아요. 도망치는 거 이골 났잖아요. 지금 안국동 쪽에서 좀 쉬고 있어요.” 휴대폰 액정이 푸르게 밝아지며 후배로부터 메씨지가 들어왔다. 켜놓은 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컴퓨터 모니터에서 커서가 난파선처럼 깜빡였다. 후배는 98학번. 나보다 10년 아래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말한다. 도망치는 거 이골 났잖아요… 아, 이건 뭔가. 이 먹먹함. 여기는 대한민국. 2008년.

 

인터넷 뉴스에 접속했다. 파란 색소를 탄 물대포. 사복체포조의 무차별 시민 연행.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고 문자를 찍었다. “조심! 머리칼 하나도 다치지 말아라! 이 정권과는 어차피 긴 싸움이야.” 문자를 보내놓고 우두커니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답답증과 분노가 끓었다. 이 정권의 행보는 도무지 해석 불능이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이토록 명백한 퇴행, 이토록 신속하고 압축적인 과거 회귀를 할 수 있는 걸까. 막무가내 먹통인 정부의 행보 앞에 도대체 동시대성을 느낄 수 없는 막막한 퇴행의 느낌은 80년대를 훌쩍 거꾸로 지나 그 어딘가 먼 과거의 소실점을 향해 회귀를 시작했다. 내 감각의 촉수가 즉자적으로 발라낸 시간의 뼈마디. 나는 아주 오래전 누군가의 해진 무릎뼈 위에 걸터앉듯이 오장환을 펼쳐 들었다. 병든 서울!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모리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웨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야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병든 서울〉 부분

온갖 장사치와 정치꾼이 자신의 잇속을 위해 설치는 병든 서울에 절망하면서도 인민이 주인되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시인의 분열증은 서울처럼 깊었다. 병들었다. 병중이면서도 그는 자책한다. 병든 서울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1945년 8‧15 이후 시인은 병든 서울을 안타까워하며 자책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으로 새 길을 삼으려 한 시인에 아랑곳없이 서울의 병은 이미 너무 깊었다. 1936년에 발표한 장시 〈수부(首府)〉에서 시인 자신이 이미 갈파했듯이 말이다.〈수부〉의 부제는 이렇게 달려있다. 수부는 비만하였다. 신사와 같이. 

 

1

수부의 화장터는 번성하였다.
산마루턱에 드높은 굴뚝을 세우고
자그르르 기름이 튀는 소리
시체가 타오르는 타오르는 끄름은 맑은 하늘을 어지러놓는다.
시민들은 기계와 무감각을 가장 즐기어한다.
금빛 금빛 금빛 금빛 교착(交錯)되는 영구차.
호화로운 울음소리에 영구차는 몰리어오고 쫓겨간다.
번잡을 존숭(尊崇)하는 수부의 생명
화장장이 앉은 황천고개와 같은 언덕 밑으로 시가도(市街圖)는 나래를 펼쳤다.

 

식민지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풍경을 펼쳐 보이는〈수부〉는 ‘화장장’에서 시작하여 ‘기차’ ‘공장지대’ ‘고층 건물’로 상징되는 근대 도시의 풍경을 짧은 쇼트들로 몽따주해 보여준다. 권위적 관료. 민중의 삶엔 아랑곳없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정치. 도시 상부계층의 값싼 교양으로 전락한 예술. 독점적 자본의 비윤리적 형성. 비만한 저널리즘과 퇴폐적인 소비자본주의. 자연의 파괴와 인공자연. 현란한 도시문명과 변두리 소시민의 비애……  
 
이 시의 ‘화장장’은 집중된 메타포이면서 실제다. 시체의 ‘효율적’ 처리와 ‘위생’을 위해 병원처럼 기획된 수부의 화장장에는 인간적 의미에서의 생사의 만남과 이별이 없다. 수부 ‘경성’의 화장장에서 죽음은 새로운 양식으로 생산, 관리되는 일종의 상품에 다름 아니다. 수부로 몰려드는 유민들은 몰려드는 만큼 병들고 죽어가지만 죽음마저도 도시의 활기로 가장된다. 생명의 느낌이 사라진 인공자연을 만나듯 수부 경성의 화장장에서 목도한 무감각한 현대성은 팽창하는 도시 곳곳에서 묵시록으로 재현된다.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이대듯 도시 곳곳에서 생생하게.

우리는 누구나 도시에서 여러 번 살해된다. 도시인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은 자신을 여러번 죽인 결과다. 본래의 욕망을 죽이고 도시적 욕망을 재창조하면서 우리는 ‘그 무엇인가에 의해’ 기획된 도시인의 삶에 스스로를 길들여간다. 도시를 기획하고 끌고 가는 ‘그 누구/그 무엇’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지만 발설하지 않는다. 암묵적 합의의 뒤편에서 통계화되는 살해의 수치는 해마다 늘어간다. 하지만 살해의 ‘사건’을 고소할 수 있는 이는 기득권자들일 뿐. 법은 지배하는 자의 편에서 ‘공무’를 집행한다. 그러니 수부는 억울하게 살해당한 좀비들의 구역. 때때로 흰 소낙비 내리는 필름이 치직거린다. 좀비들이 뛰어다닌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이 시의 마지막

11

수부는 지도 속에 한낱 화농된 오점이었다
숙란하여가는 수부―
수부의 대확장― 인근 읍의 편입  

 

강렬한 이미지의 게릴라식 몽따주로 근대 조선의 자본주의 일상을 누아르 필름처럼 펼쳐놓은 오장환의 〈수부〉는 야생의 직관으로 번뜩인다. 생것의 감각인 직관의 통찰. 오장환이 아방가르드와 통한다면 관습과 규율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언어 사용 방식과 직관의 감각 때문이리라. 나는 이 시가 보여주는 초상 속에서 독백을 씹어뱉는 고독하고 물기 많은 사내들을 상상한다. 장국영이라든가 양조위쯤으로 해두자. “대체 저널리즘이란 어째서 과부처럼 살찌기를 좋아하는 것인가.” 장국영이 독백한다. “비만한 상가, 비만한 건물, 휘황한 등불 밑으로 기어들기를 좋아하는, 너는 늬 애비의 슬픈 교훈을 가졌다.” 양조위가 메마르게 중얼거린다. 좀더 섬뜩한 독백이라면 이건 어떤가. “끼익 끼익 기름 마른 피대가 외마디 소리로 떠들 제/직공들은 키가 줄었다/어제 도 오늘도 동무는 죽어나갔다” 나는 의미 없이 줄장미 덩굴에서 장미꽃을 따내어 개천에 버리다가 비만한 도시의 핵심으로 단박에 질주하는 말의 화살에 관통당한다. 화농된 오점. 수부의 대확장. 인근 읍의 편입.

수부 경성과 마찬가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지만, 서울은 오직 서울이다. 서울은 다른 모든 지방의 피와 근육을 빨아먹으며 팽창한다. 도시균형발전이 의제로 제출되고 지방도시에 대한 각종 혁신안들이 출몰해도 결과는 매양 마찬가지. 지방도시 발전의 최종 수혜지는 결국 서울이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확장된다. 지역의 것도 서울에 선을 대는 순간 서울의 것이 되고, 서울에 선을 가지지 못하면 지역에서도 성장할 수 없다. 위정자들의 사고는 더욱 뻔하다. 서울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도시계획의 지겨운 반복. 고속철도가 놓여도 복복선 전철이 놓여도 결국 최종 수혜지는 서울인 이 기이한 괴물의 성장법. 이쯤 되면 이 기괴한 성장은 곧 퇴화이기도 한 것. 점점 더 거대해지는 화농의 오점. 병든 서울은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서울도 스스로 힘들 것이다.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신도시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점점 넓어진다. 서울 가까이 사는 신도시인들은 경기도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서울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 더 가깝다. 서울에 가까워서 안도하고 서울은 아니어서 묘한 피해의식을 지닌 채 서울을 들락거린다. 수도권의 가시영역은 점점 넓어지는데 정작 서울은 상위 5% 계급의 힘으로 유전되고, 계급의 정점에 있는 이들의 자본에 매달려 목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광범위해진다. 자본의 파시즘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서울을 지배한다. 자본에 의한 폭력은 가난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병든 서울의 역사성은 소시민의 공포를 극대화하면서 만수무강하다.

어쩌나. 푸른 기와집의 사람은 저 오래된 병든 서울의 기원을 닮았다. 수부에 대한 ‘개발독재’의 집착은 오래된 관습.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서울시장 시절부터 그는 수상했다. 그의 하나님이 물신의 자본으로 보이는 까닭을 굳이 설명해보일 필요는 없겠다. 수상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인민이여 감당할 수밖에.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는 멀지만 세월은 흐르고 새날도 오겠거니. 한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우선은 안간힘으로 막으면서 세월을 버텨보는 수밖에. 자기 잇속만 아는 정치인과 장사치의 출몰이야 병든 서울의 기원에서부터 익숙한 아주 오래된 풍경이니 인공자연을 함부로 들여 생명을 죽이는 일만 막아놓는다면 어쨌거나 아주 절망은 아닌 셈. 회복의 가능성은 있는 셈.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오늘을 견디며 싸울 힘을 찾을 수 없으니.

머리칼 하나도 다치지 말아라. 오래 싸워야 할 모양이다. 푸른 색소의 물대포에 맞아 푸르게 얼룩진 채 젖은 머리채를 종로 거리에 앉아 말리는 후배에게 고작 문자메씨지나 보내놓고 나는 술을 마셨다. 이 방자하고 괴이한 정권이 앞으로 5년간이나 푸른 물대포를 쏘아댈 일을 생각하니 억울해 술을 마셨다. 괜찮아요. 경찰이랑 몸싸움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이골 났잖아요. 집권한 지 6개월밖에 안된 정권이 나보다 10년이나 어린 후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는 게 억울해서 술을 마셨다. 술 마시며 문득 나는 병든 서울아, 외치고 있는 거였다. 그날 밤 오장환을 읽었다. 병든 서울 때문이었다. 병든 권력 때문이었다. 병든 고향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 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붉은 산〉 전문

2008.9.3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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