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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어가는가

진정석

진정석 | 문학평론가

영화 마니아와 다큐 필름 애호가들 사이에 이미 상당한 입소문이 나 있는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이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7월 10일부터 16일까지 1주일간 진행되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화해와 공존, 번영의 아시아’란 주제 아래 다양한 쎅션과 행사를 통해 100여편의 작품이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얼마 전 그중 몇편을 미리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영원히 당신만을〉(Forever Yours, 2005년)이라는 감상적인 제목의 소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유럽 전역에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1939년 부다페스트. 전도유망한 유대계 청년상인 페렌츠 창고(Ferenc Csango)는 댄스파티에서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신혼의 기쁨도 잠시, 그는 1942년 러시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실종되고 만다. 그로부터 몇년 뒤,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아내 마그다(Magda Csango)는 우연히 충격적인 소문을 듣게 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상점이 인도의 뭄바이에 하나 더 생겼다는 것. 남편의 희귀 성(姓)인 ‘창고’를 상호(商號)로 삼고 있으니, 주인은 페렌츠 본인이거나 아니면 그와 아주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남편은 과연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일까? 만일 살아 있다면 왜 즉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혹시 그동안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무슨 말 못할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어쩌다 머나먼 인도 땅까지 흘러들어갔을까?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인도로 가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내는 한달음에 인도로 날아가는 대신 예전처럼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남편을 애타게 찾던 그녀의 돌연한 변신은 또 무슨 까닭인가? 혹시 남편의 변심을 예감한 것일까?

〈영원히 당신만을〉은 이로부터 무려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루어진 손녀 모니카(Monica Csango)의 인도 방문기를 담고 있다. 비록 상영시간 52분에 불과한 중편급 소품이지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정교한 교차편집, 관객의 감정선을 조절하는 적절한 배경음악, 그리고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욱 탄탄한 극적 구성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모니카 창고 감독은 조부의 행방을 추적하는 탐색의 스토리를 한편에, 조모와의 은밀한 심리적 대결을 다른 한편에 배치함으로써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마그다와 모니카의 대립은 ‘페렌츠의 실종’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에서 비롯된다.

손녀 모니카는 인도 방문을 통해 조부의 기이한 행적을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그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수용소를 탈출한 페렌츠는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정착했고 거기서 고급 제화점을 운영하며 한동안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다 다시 종적이 끊겼다. 그는 왜 이처럼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인연을 끊어야 했을까? 수용소 생활이 준 엄청난 정신적 외상(trauma)은 이런 선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과연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탐문과 조사, 추론을 통해 조부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모니카의 행로는 자기정체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정신적 여행과 정확히 겹친다.

반면, 조모 마그다는 남편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의 방식은 자의적인 상상과 윤색으로 상처받은 자존심과 굴욕감을 보상하는 것이다. 그녀는 전쟁통에 불구자가 된 남편이 가족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한다고 상상함으로써 남편의 부재를 합리화한다. 그녀의 상상에 따르면 남편은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설사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가족을 배려하는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다. 처음 인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남편임을 직감했겠지만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녀에게 뭄바이는 두렵고 끔찍한 장소, 그러므로 그녀의 생에 부재하는 장소다. “나는 너무나 어렵게 살고 있다. 만약 그가 거기 살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그의 일이다. 그러나 난 상관하지 않는다.”

두 여자는 주어진 ‘사실’에 추론과 상상을 가미해 각자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모니카가 ‘사실’의 재구성을 통해 은폐된 진실의 복원을 시도한다면, 마그다는 ‘허구’의 창안을 통해 환상의 충족을 꿈꾼다. 모니카가 합리적 비판을 중시하는 사실주의 작가라면, 마그다는 초월적 욕망에 이끌리는 낭만주의 시인에 가깝다.

이들의 서로 다른 ‘현실’은 가끔 심한 충돌을 빚기도 한다. 모니카가 조모의 감상적 판타지를 냉정하게 추궁할 때, 마그다는 자신의 전생애를 부인하는 손녀의 잔인함에 맹렬히 저항한다. 아마 마그다의 ‘현실’보다는 모니카의 ‘현실’이 ‘사실’에 좀더 부합하겠지만, 그 차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의 선택적 수용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은 둘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실’은 ‘사실’의 일정한 왜곡과 심정적 ‘진실’의 절실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도적인 시선은 당연히 합리주의와 현실주의에 기초한 ‘모니카 세대’의 그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당신만을〉은 그 시선의 주도성을 특권화하지 않는다. 사실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합리주의 세대의 분석과 추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 또는 ‘할머니의 회한’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공감과 연민에서 나온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런 상상과 공감, 연민의 능력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와 그 문화적 표현을 ‘영원'(Forever)의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물론 많은 ‘모니카들’이 이런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편이긴 하지만.

2006.07.18l ⓒ 진정석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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