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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언어와 문학의 위엄

정홍수

정홍수|문학평론가

평생 형형한 호랑이 눈을 부릅뜬 채 한시도 몸과 머리를 쉬지 않고 살아온 여든 어름의 늙은 아버지가 있다. 일찍 아비를 여의고 눈앞이 캄캄한 세월을 죽을 각오로 살아냈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으면서도 농사만 짓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야무지게 스무 마지기 논농사와 3천평 밭농사를 일궜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깜깜한 논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가혹한 운명을 무릎 꿇리며 한세상을 살아왔다.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자 선을 긋고 단호하게 눈을 거두어버리고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이 옆에서는 지아비와 자식밖에 모르는 한없이 순종적인 어머니가 그림자처럼 평생을 함께했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아들은 노모로부터 아버지가 자꾸 정신을 놓는 것 같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소설 화자인 아들은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을 하루 앞두고 직장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월차를 낸 뒤 시골집으로 향한다. 정지아(鄭智我)의 단편 〈봄빛〉(《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이야기다.

간략히 소설의 밑그림을 옮겨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소설 유형 아닌가. 감동의 발생 지점도 어느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런 소박한 곡조에 어떤 새로움이 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다. 이 소설이 주는 투명하고 묵직한 감동은 그런 쉬운 짐작을 무색케 하면서 인간 진실의 처연한 봄빛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딱히 언어론적 전회(轉回)를 비롯한 다양한 담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언어의 재현적 역할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궁핍화와 함께 본래의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부분적인 소설적 기술로 그 위상이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논의는 내려놓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보여주는 일이 좋은 소설의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라는 점을 정지아의 〈봄빛〉은 새삼스럽게 웅변한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을 맞아 노모가 차려낸 저녁밥상의 풍경이 단연 그러하다. “그가 온다고 아침부터 종종걸음치며 준비했을 밥상은 ‘한가꾸’를 넣은 된장국과 취나물과 머위대와 두릅, 그리고 묵은 김장김치가 전부였다.” 아들은 지난가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반찬 가짓수에서 불과 두 철 사이에 또다시 세월이 앗아가버린 노모의 쇠약해진 기력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짠한 밥상이 들려주는 정말 비감한 이야기는 늙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의 몫이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대화 사이 소설 화자인 아들의 반응은 생략한다).

“내동 일렀는디 또 뚜부가 없그마이!”
“아이고, 점심에 뚜부를 그렇게 묵고 또 먼 뚜부를 찾소? 저녁은 그냥 잡수씨요. (…)”
“나가 원제 점심에 뚜부를 묵어!”
“환장하겄네.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그마이. 인자 점심에 멀 묵었능가도 모리겄소?”
“그걸 왜 몰라! 점심에 청국장 묵었제. 나가 그것도 모르깨미 이 사램이 꺼떡하먼 노망 들었다고 엄한 사램을 잡고 야단이여, 야단이!”
“청국장에 뚜부가 들었습디여? 안 들었습디여?”
“그까짓 것이 월매나 된다고!” (…)
“미치고 환장하겄네. 그 징헌 놈의 뚜부, 된장찌개에 넣고 청국장에 넣고, 동태찌개에 넣고, 끼니마동 빠진 적이 없그마는 먼 놈의 뚜부를 또 지지라요?” (…)
“아 긍게 누가 이것저것 하랬냐고! 그냥 뚜부 듬성듬성 썰어넣고 멜치나 멫마리 너먼 될 것을 그거시 멋이 어렵다고 한끼를 안해줘! 한끼를!”

전에 없던 아버지의 반찬 타령도 그러하지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어머니의 변화 또한 아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그런데 《미메시스》의 저자가 펼친 논의에 기댄다면 스타일 분리를 엄격히 고수하던 고전주의 문학의 세계에서는 희극 장르에나 어울릴 법한 이 범속하고 격조없는 대화의 언어가 인간 이해의 장에 던져주는, 착잡하지만 풍요로운 실감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도 억양에 실린 이 ‘뚜부’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문학적 표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비는 ‘종’일 수도 있고, ‘남로당’일 수도 있고, ‘개흘레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피임약을 사러 죽어라 뛰고,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계속 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비든 생로병사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다. ‘뚜부’는 그 불가항력의 시간 앞에 도착한 모든 아비들의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생의 의지이며 사위어가는 마지막 위엄일 것이다.

마침내 근대 리얼리즘이 일상의 범속한 현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현실의 묘사 혹은 재현의 중심에 섰던 소설은 그 자신이 비추어낸 역사나 인간이 생각 이상으로 초라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짐짓 놀라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장식적인 세련을 거부하고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그들의 감각적 진실을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소설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봄꽃〉의 ‘뚜부’는 그같은 근대소설의 근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밥상을 둘러싼 언어들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 앞에 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퍅한 일생을 요약하는 강렬한 문학적 위엄에 어찌 닿을 수 있었으랴. 이것은 닥치는 대로의 현실에서 수집한 소박한 언어가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치매선고를 받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새벽부터의 긴 실랑이 끝에 지쳐 잠든 늙은 부모를 후면경으로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과 눈물에 독자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 눈앞이 캄캄했다. 근디 이상하지야. 눈앞이 캄캄헝게 무선 것이 없드라. 아홉살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상하게 그 역시 무섭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로는 혹 싱거운 사족은 아닐 것인가. 그러나 정지아의 명편 〈행복〉의 여로를 여기에 겹쳐 떠올리는 독자라면, 이 담담한 수락이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어떤 느꺼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 계간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계간평 중에서

2006.08.15 ⓒ 정홍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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