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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정남영

마음공부의 길을 걸어 변혁의 광장으로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모시는사람들 2016

 

 

rehhr『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는 29년(1988~2016)에 걸쳐 백낙청이 쓴 원불교 관련 글 18개를 박윤철(원광대 원불교학과)이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비교적 짧은 글들이고 대담과 강연이 여기저기 끼어 있어서 이 책을 원불교 사상에 대해서든 대전환과 변혁에 대해서든 심층적인 연구서라고 하기는 힘들다. 저자 자신도 “제목을 감당할 온전한 저서가 아닌 점”(「지은이 후기」, 388면.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일관된 관심”(389면)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 “일관된 관심”은 현 시국에 대한 백낙청의 판단, 그로부터 나오는 근본적인 변혁의 필요성, 그리고 변혁의 힘과 방식이 원불교의 교리가 가진 잠재력과 만나는 자리에 집중된다. 이 자리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를 이에 상응할 수 있는 서양에서의 움직임들에 비추어보기도 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이 서평의 목적이다.

 

‘문명의 전환기’와 대전환의 변혁론

 

백낙청은 현 시국을 문명의 전환기로 파악한다. 원불교의 용어로 하자면 물질개벽(선천)에서 정신개벽(후천)으로의 전환이요, 세속의 말로 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시대의 현실”(198면)에서 그 너머로의 전환이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이중적 측면을 파악한 사람이다. 한편으로 자본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가진 것으로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생산력 발전의 결과로 자본주의가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그 공동체적, 사회적 생산성을 사회적 부로서 삼는 데 기반을 둔 자유로운 개성”(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by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158면)이 꽃피우는 사회의 조건을 마련하고 사멸하리라고 전망했다. 전자는 물질개벽에, 후자는 정신개벽에 상응한다 할 수 있으니, 백낙청이 원불교에서 “마르크스와의 상통성”(211면)을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현 시국에 대한 백낙청의 판단에는 “인류 전체가 멸망될 수도 있는 위기”(73면)라는 의식도 포함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파산”이 자본주의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려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264면), 사실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낳은 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물질대사의 단절’(metabolic rift. 『자본론』 3권 47장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 들어있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사회학자 포스터John Bellamy Foster가 개념으로 다듬은 것이다.)―이것이 예컨대 탄소의 추출에 의한 기후변화와 산업적 농업에 의한 토양 열화(劣化)를 낳았다―과 최근에 이야기되는 ‘순에너지의 감소’(엔트로피의 증가)는 물질개벽이 낳은 물질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로서 인류의 멸망을 과장법이 아닌 목전의 현실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으로 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느냐 하는 갈림길”(170면)이라는 시국 진단은 적절한 것이며,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넘어가는 대전환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개벽’이라고 부를 정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힘을 생산력의 물질적 측면보다는 새로운 주체성―“생산과 부의 거대한 초석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Grundrisse, 705면)―에서 보았듯이, 백낙청도 변혁에서 주체성의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춘다. 백낙청이 한국의 촛불 대중에게서 큰 잠재력을 본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주체의 활력을 높이는 공부로 ‘마음공부’를 들고 있는 것은 남다르다. ‘마음공부’는 원불교의 교리에서 삼학을 구성하는 ‘정신수양’(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의 양성), ‘사리연구’(현실에 대한 지식 획득) 및 ‘작업취사’(정의로운 실천)를 관통하는 활력 양성의 원리이다. 서양 변혁론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마음공부’가 ‘음풍농월’이라는 말과 다름없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레닌에게서 한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 이 변혁론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기반으로 했으며, 주체를 중심으로 삼는 태도를 주관주의 혹은 주의주의(voluntarism)라고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대중의 마음공부에 충분한 배려를 안 했던”(212면) 것은 사실이지만, 레닌은 그것을 보완하기보다 더 후퇴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미 레닌의 시대에 마르크스를 이어받아 주체성의 측면을 강조한 레닌의 경쟁자가 있었지만(저 뒤에서 잠깐 언급할 보그다노프이다. 보그다노프는 레닌에 의해 볼셰비키에서 추방되었다), 시간이 더 지나서야 주체성을 강조하는 사고가 서구의 사상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다. 자연과학에서 1950년대에 서양의 ‘객관주의’를 비판하는 글이 나왔거니와(슈뢰딩거의 「정신과 물질」), 정치철학에서는 1970년대 무렵부터 일어난 ‘자율주의적 전회’가 주체의 능동성으로의 초점 이동을 나타낸다. 이는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의 ‘삶정치’론(‘다중’론)으로 다듬어진다.

 

그런데 ‘삶정치론’에도 ‘마음공부’가 명시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다. ‘마음공부’라는 것이 서양식의 이론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푸꼬(M. Foucault) 같은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삶정치’론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푸꼬이다.) 푸꼬는 1970년대에 꼴레즈 드 프랑스에서 통치성(권력의 합리성)과 관련된 일련의 강의를 한 뒤에 1980년부터의 강의에서는 주체의 활력 양성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그는 존재와 진실의 관 계를 서양 형이상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푸꼬의 관심은 좁은 의미의 ‘영혼’이 아니라 “자기에의 몰두, 자기 돌봄에 다름 아닌 근본적인 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실천들이다. 그런데 이는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마테마타’의 차원―원불교의 ‘사리연구’―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연마행동들”의 차원이며 “수행의 차원이다.” 푸꼬의 관심은 자기 돌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용기’―이는 원불교의 ‘진행 사조’에 가깝다―를 매개로 ‘다른 삶’,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수행이 ‘인류와 세계의 변형’과 연결되는 것이다. ‘자리이타’의 사례라 아니 할 수 없다.(이상 인용은 Michel Foucault, Le Courage de la vérité, Paris : Seuil, 2009, 309~11면) 푸꼬는 이 연구를 일정 정도 이상 진척시키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그의 말년의 이러한 연구는 서양에서 ‘마음공부’를 변혁적 실천과 연결시킨 특이한 사례임이 분명하며, 이는 백낙청의 문제의식이 본격적인 서양식의 연구와도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희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의 폭넓은 함의

 

백낙청이 변혁주체(민중)의 힘의 양성을 ‘마음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삼학병진(三學竝進)에서 찾는다면, 변혁의 노선으로서는 ‘중도’ 노선을 택한다. 여기서 ‘중도’가 단순히 좌우가 아닌 그 중간 것이라는 제도권 정치의 상투어일 리는 없다. 내 생각에 백낙청이 말하는 ‘중도’―이는 변혁운동에 적용되는 바의 ‘중도’로서, 변혁운동에서 ‘일원(一圓)’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는 첫째, 민주적 의사결정의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지난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이라는 큰 성취를 이루어낸 촛불 주권자들의 경우를 보면, 지도자가 없으면서도 열린 광장에서 상호작용하고 또 인터넷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어느덧 그때그때 주권자들이 요구하는 바가 결정되어 나온다(이대 학생들의 투쟁에서도 이런 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 남보다 더 영향을 미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지자본위’가 당연하게 작동한다―소수의 지도자들, 전문가들의 견해에 주착되는 제도권 정치 방식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째로 ‘중도’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면서도 열어주는 원리로 작동한다. 위에서 말한 민주적 결정은 곧 참여하는 ‘모두’의 결정이므로 특정 양태의 통합 혹은 ‘하나됨’이 존재한다. 이 ‘하나됨’은 권력에 의해 동질화되어 묶이는 식의 통합이 아니라 차이들이 스스로 연결되어 구성한 ‘하나됨’이다. “형형색색으로 벌여 있는 소를 한덩어리로 뭉쳐서 대를 만”드는 것(『대종경』 205면)인데(‘이소성대’) 다만 만드는 주체가 참여하는 ‘소’들 자체이다. 그리고 ‘소’들의 전체는 새로운 참여에 열린 ‘모두’이다.

 

이렇게 볼 때 ‘중도’는 나아갈 방향을 함께 정하는 민주적 결정의 원리인 동시에 열린 전체를 형성하고 또 그것을 열린 상태로 유지하게 해주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공통적인 것’ 개념도 바로 이러한 하나됨을 사유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름만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보그다노프(A. Bogdanov)의 ‘노동의 관점’도 사실은 인류 전체의 관점으로서, 그간 전문화 형태로 이루어진 인류의 모든 지적·정신적 성취가 분열과 분리를 극복하고 서로 협동하여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지향한다. 백낙청도 “중도 자체는 근대의 이중과제보다도 한결 높은 차원의 범인류적 표준이기도 하여 다른 여러 차원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281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백낙청의 전환론 및 변혁적 중도주의와 원불교의 만남은 다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전환을 위한 새로운 사유들·실천들과의 만남으로 열려 있다. 자본과 국가의 외부에서 생계자급을 포함한 자율적 삶을 구축하는 커먼즈 운동(the commons movement), 생명을 넘어 무생물에까지 뻗어가는 생태론적 감각의 회복/수립, 물질대사의 단절이 없는 순환경제의 창출, P2P 생산. 계몽(Enlightenment)에서 살림(Enlivenment)으로의 전환,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들의 창출 및 그에 따른 새로운 가치론의 수립, 자본과 국가에 의해 박탈된 삶의 내재성 탐구, 낡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참여민주주의를 향하는 움직임들 등등. 이러한 움직임들과의 만남은 원불교와 백낙청의 일만은 아니다. 이에 동의하는 모두의 일이다. 지금은 인류 전체의 협동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모든 이들이 자신이 처한 곳에서 자신이 대면하는 장애물들을 부숴가면서 이 협동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정남영 / 독립연구자

2017.3.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