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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각하들의 이야기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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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현실을 깊이있게 파고든 예술작품은 당연히 대상으로 삼은 현실의 주요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체로 당시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시대가 되길 기대했는지 보여주는 역사가 되기도 한다.

 

국립극단이 “독특하고 문제적인 인물과 탄탄한 서사의 근현대 희곡을 재조명해 오늘날의 모습을 반추”할 것을 표방하며 상연 중인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김광보 연출)는 극작가 오영진이 1949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극단이 의도한 대로 일제강점과 미군정이라는 고난의 시대를 오로지 자기이익을 좇아 살아왔고 정국의 혼란을 틈타 권력마저 탐하기 시작한 ‘이중생’이라는, 너무나 낯익은 ‘현재적’ 인물을 매개로 어제의 풍자와 오늘의 비판을 연결하고 있다.

 

65년 전 작품의 익숙함과 다름

 

이 작품에서 이중생은 하인의 자식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마저 등 떠밀어 징용에 내몰았을 뿐 아니라 미국 천지가 된 지금은 제지사업 원조금을 따내려고 둘째 딸을 (사기꾼으로 밝혀지지만) 미국 원조기관 직원의 애인으로 만든다. 상상을 초월한 탐욕이며 천하의 인간 말종,이라 간단히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뉴스를 틀 때마다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지금의 우리에겐 그런 ‘순수한’ 분노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와 돌이켜볼 때 눈길을 끄는 사실은 엉뚱하게도 그때는 그래도 돈과 권력을 위해 ‘댓가’는 치렀던 시대였구나 하는 것이다.

 

이중생이 치르는 댓가에는 본인의 법적‧사회적 ‘존재’마저 포함된다. 횡령, 배임, 사기, 탈세 혐의에 줄줄이 걸려 국회 조사까지 받게 된 이중생은 그 난관을 벗어나고자 자살을 위장하여 처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어수룩한 사위의 이름을 빌려 남은 인생 다시 떵떵거리기를 꾀한다. 블랙코미디의 진가가 발휘되는 이후의 전개는 극장을 찾아 음미해야 마땅할 것이고, 어쨌든 재산이 몽땅 무료병원 건립에 쓰일 사태가 벌어진 데 이어 사할린에 억류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온 아들로부터 ‘아버지의 시대는 갔다’는 선언까지 듣게 된 이중생은 자신의 신체적 존재마저 지우지 않을 수 없는 결말을 맞는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실제 역사가 이런 결말로 가지 않았으며 많은 이중생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각하’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결말에서 아들의 대사가 느닷없이 계몽적이고 반공애국적인 어조로 흐르는 것도 그와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당대가 어떤 시대가 되길 원했는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도 이처럼 드라마가 현실과 갈라지는 듯 보이는 대목이다. 돈 욕심으로 흥한 자가 바로 그 돈 욕심 때문에 스스로 몰락하는 시대, 징용에 내몰려 고통받은 아들이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사회에 봉사하려 한 사위 같은 다음 세대가 사회를 재구성하는 그런 시대가 되는 것. 실현되지 못한 순진한 소망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그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당대 역사의 한 부분일 것이며, 풍자의 날카로움보다 그 소망의 상실이 남긴 빈자리가 이 작품과 오늘을 이어주는 더 선명한 연결점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눈으로 보는 과거의 양상

 

이중생을 위시한 아버지 각하를 청산하지 못하고 아들들의 연대를 성취하지 못한 채 이후 힘 있는 아들(장남)이 ‘살아 있는 각하’ 자리를 물려받은 역사를 이기호는 그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한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측면에서 조명한다.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가 그리는 대상은 ‘살아 있는 각하’의 한 사람이자 (실제로 이 작품에서 장남과 차남의 일차적 지시대상은 카인과 아벨이지만) 아버지 자리를 차지한 장남 비유에 여러모로 부합하는 전두환의 시대다. 같은 시대를 다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가 이 시대의 원초적 사건이라 할 광주를 곡진하게 형상화했다면, 이 소설은 작가 특유의 블랙코미디 풍으로 1981년 중앙정보부가 안전기획부로 바뀌면서 “그냥 ‘위험’이 아닌, 존재하지도 않는 ‘위험’으로부터 각하를 ‘안전’하게 보필”(177~78면)하기 위해 숱하게 양산된 ‘기획’들이 망가뜨린 삶에 초점을 둔다.

 

이런 기획들이 지금도 원기왕성하게 집행 중이라는 사실은 얼마 전의 유우성씨 간첩조작사건으로도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소설이 보여주듯이 안기부에는, 잡혀가도 나서줄 가족이 없는 고아 출신이 ‘노다지’이고 거기에 월북한 아버지를 둔 고아라면 금상첨화였던 것에서 이제 중앙합동신문센터의 ‘탈북자’들이 급부상한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지. 그 사실이 새삼 분명해진 이 시점에서 80년대를 돌아본 탓인지 이 소설은 차남 서열의 끝자락인 주인공 나복만이 자기 삶을 향해 한발짝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의도하든 아니든 그렇게 현재는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 필연적으로 기입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뭐 하나 변변히 청산하지 못한 오늘의 처지가 지난 시대의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배어든다면, 오늘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어내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가 보여준 각하의 몰락이 소망성취가 아니라 멀리 내다본 예견이었다고, 그리고 『차남들의 세계사』가 실상으로 보여준 각하의 건재가 반드시 엄연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올 지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은 그저 오늘만이 아니며 ‘살아 있는 각하들’의 이야기는 거듭 씌어져야 한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4.9.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