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바지

정지돈

 

정지돈

정지돈

비폭력이란 평화 상태가 아니라

분노를 명확하고도 효과적으로 만드는 사회·정치투쟁,
즉 세심하게 세공된 ‘엿 먹어라’다.
— 주디스 버틀러

 

 

 

 

1

 

처음에는 촛불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촛불집회에 요구되는 비폭력, 질서, 평화라는 가치에 대해, 온건하게 변한 시위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뭔가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을 말할 생각이었다. 나는 1983년생으로 촛불세대라(는 것이 있다면) 부를 만한 위치에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스무살이었고 그해 효순이, 미선이를 위한 최초의 촛불집회가 있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광장에 나갔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차벽이 설치되었을 때도 광장에 있었다. 그날 나와 친구들은 광화문에서 종로로 행진했고 길바닥에 앉아 술을 마셨으며 먹고 마신 술과 안주는 깨끗하게 치웠다. 그리고 몇해 지나 대통령으로 박근혜가 뽑혔다. 함께 시위를 했던 친구들은 하려고 했던 일을 포기하고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고 대부분 취업에 성공해 돈을 벌지만 시간은 없고 스트레스는 많아 번 돈의 대부분을 해외여행이나 취미, 쇼핑에 탕진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아무튼 나와 친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한국은 가망 없다’ ‘다시 태어나야 해’ 같은 것으로 소위 ‘헬조선’이라는 거다. 헬조선인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이 글의 주제에 국한해 다시 말하면, 우리는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에 나갔고(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으며(나는 다른 사람을 지지했다), 촛불집회라는 감동적인 시위문화를 만들었고(나는 물대포도 맞을 뻔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을 증오하게 됐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왜 우리는 일관되게 희망을 찾지 못할까. 왜 우리는 만성적인 피로감과 패배감을 느낄까. 물론 이러한 희망 없음에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과장은 ‘88만원세대’라는 말과 비슷한데, 나는 이 용어가 유행할 당시 정말 다들 88만원만 벌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생각보다 돈을 잘 벌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능력이 있나?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건 88만원보다 잘 번다고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워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거다. 큐브 세대라는 말도 그렇다. 나는 비록 큐브에 살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집을 얻었다. 은행에서 갖은 굴욕을 당하고 전세에 교통이 불편한 곳이긴 하지만 어쨌든 집을 얻었다. 희망 없음을 상징하는 ‘3포세대’인 우리가 집도 얻고 결혼도 하고 매년 해외여행도 간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망한 느낌이고 한국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만 해도 이십대에는 상상도 못할 가격의 옷을 사고(지난주에는 무려 19만원짜리 바지를 샀다) 도서관에 가기 귀찮아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정도로 믿지 못할 부를 누리며 그럭저럭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뭔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기 힘든 걸까. 특히 이런 경향은 사회, 정치 문제에서 더 심한데 우리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한 채 해외여행과 각종 취미, 소비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어쨌든 그렇다고 마냥 우울하게 살 순 없지 않나. 친구는 플레이스테이션4를 샀고 ‘MLB더쇼’라는 게임에 빠졌다. 그는 말했다. 내 캐릭터 이름은 테리 이글턴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얘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든 촛불세대라는 이들이 만성적인 패배감에 시달린다는 소리고 촛불은 우리 내면에 결국 안 된다, 박근혜를 우리가 안 뽑아도 윗분들이 뽑으니 되더라 따위의 생각만 남겼다는 소리다. 흔히 하는 얘기처럼 4·19세대나 6월 민주항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승리의 경험을 갖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패배의 경험만을 갖고 있다는 거. 우리는 촛불을 손에 들고 용산참사와 세월호사건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는 거. 그런데 4·19세대는 박정희 다음에 전두환이 집권했는데 어떻게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6월 민주항쟁이 끝나고 노태우가 집권했는데 승리?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런 역사의 흐름과 전체적인 무의식에 대해선 그만 얘기하자. 한 세대가 패배감을 갖는다, 승리감을 갖는다는 얘기는 흥미롭지만 추상적이고 별 소득이 없다. 그것보다 우리의 에너지는 어디로 분산되는가, 우리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가 ‘개망함’으로 귀결되는 모습만이 정말 우리에게 남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나는 촛불시위를 함께 만든 세대지만 패배감만 느꼈고 결국 이런 평화시위가 무력감만을 남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전 세대의 시위문화에 대해 알지 못했고 우리가 만들어낸 시위는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새로운 형태의 시위가 시작된 지 겨우 10년이 조금 넘은 상황에서의 생각일 뿐이다. 바뀐 시위문화, 바뀐 시위의 언어와 방식이 그냥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연장되고 지속되고 변화하면서 뭔가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 또 반기문이 뽑히고 은행에 빚독촉을 당하고 삼성이 권력승계를 하는 등 망함의 순간이 계속될지도 모르지만, 시위에 대해, 패배감이라는 세대감에 대해 비관하는 게 정말 옳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언론에서 과장하는 ‘세계를 놀라게 한 평화시위’ 프레임도 아니고 역시 언론에서 과장하는 ‘3포세대’, ‘헬조선’ 프레임도 아닌 저편에 우리가 만들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2

 

평화시위, 비폭력 시민불복종, 간디, 마틴 루서 킹, 오큐파이(occupy), 오트포르(otpor), 사빠띠스따(Zapatistas), 에보 모랄레스, 아르헨티나 민중봉기, 우산혁명, 오렌지혁명, 튤립혁명, 장미혁명 등등…… 나는 일종의 혁명 마니아로 친구들에게 늘 시위나 혁명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친구들은 무슨 시위대가 쓰레기를 줍고 있냐, 차벽에 붙은 스티커는 왜 떼냐, 감정이입을 시위대에게 안 하고 경찰에게 하다니! 청와대로 돌격!! 따위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촛불 헌팅을 당했다고 했다. 종로3가에서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같이 시위하실래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시위가 이래서 되겠어? 친구가 따지듯 물었다. 시위가 문제가 아니라 ‘한남’이 문제야. 다른 친구가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10월말부터 12월까지 광화문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시위는 하나의 상징이 됐는데, 그건 그들이 소녀시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니다. 이화여대는 폭력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운동권을 배제했고 이화여대 내부 사안과 떨어진 정치·사회 현안을 발언하지 못하게 했다. 느린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지도부 없는 만민공동회를 만들어 이화이언 같은 웹 커뮤니티나 카톡 단체창에서 의견을 공유하고 논의하고 결정했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에서는 이화여대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이화여대의 시위 방식에 대한 비판 기사를 여러번 실었다. 논지는 정치성이 표백된 시위에는 한계가 있다, 소수의 운동권을 배제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등이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운동권이 배제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권의 언어와 방식은 묘하게도 이 정권과 닮아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가진 뉘앙스와 메커니즘이 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화여대에서 운동권을 배제한 것은 운동권이 정권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의 언어와 방식이 사실은 구체제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운동권의 언어와 정권의 언어는 같은 체제에 복속한다. 그에 반해 이화여대의 언어는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에 권력은 대응할 방법을 잃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수십만건 조회를 기록하며 퍼져나가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물리적 폭력 없이 본관에 앉아 회의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데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점거가 지속되는 동안 이만건이 넘는 제보가 쏟아졌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정권의 치부가 드러났다. 어쩌면 우리는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우리가 느끼고 체감하고 사용하는 언어와 매체로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는 방법을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쉬운 예로 경찰이 이화여대 시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동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주동자가 없다면? 위계가 없으며, 주요한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현실정치와 연계해서 주장하는 단체가 없다면? 이 시위가 정말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참여자들의 주장을 일일이 모은 것이라면 권력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천명, 만명, 십만명을 모두 잡아갈 것인가.

 

물론 지금의 시위 방식이나 시위를 호명하는 방식이 모두 옳다는 건 아니다.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는 ‘평화시위’는 시위의 힘에 제약을 가하고 시위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심어준다. 시위는 혼란과 무질서에 기반을 둔 행위다. 시위는 폭력을 쓰지 않을 때조차 폭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폭력과 다르다. 다시 말해 비폭력시위의 폭력은 정권의 폭력과 대비됨으로서 힘을 획득한다. 비폭력시위의 폭력은 혼란과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반면 정권의 폭력은 억압적인 질서와 안정을 도모한다. 질서와 안정은 권력의 언어다. 흥미로운 건 질서와 안정을 주장하는 정권은 내부적으로 완전한 혼란 상태, 아노미 상태로 오직 권력에 의한 위계로만 지탱되는 데 반해 무질서와 혼란을 통해 의견을 관철하는 시위대는 내부에 조금의 권력이나 위계 없이도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다는 점이다. 단순히 평화시위를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문제를 넘어선 곳에 질서와 무질서의 교차가 놓여 있다.

 

비폭력시위는 내부의 질서를 통해 외부의 무질서를 만들어낸다(교통을 마비시키고 통행을 방해하고 노동을 중단한다). 외부로 표출된 무질서는 억압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권력을 지탱하는 정권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무너진 정권 위에 시민들의 새로운 질서가 유입되는 것이 혁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계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촛불집회나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안정과 질서, 평화에 대한 말들이다. 문제는 비폭력을 질서와 안정으로 연결시키는 태도이며 이를 평화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비폭력시위는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행위지 평화로운 행위가 아니다. ‘정국이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정해진 절차를 따르라’ 같은 말은 거짓된 질서를 강요하는 말에 불과하다. 시위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지금까지 늘 절차를 따라왔다. 오직 정권과 권력자들만이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지금 여기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만든 것이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촛불집회와 이화여대 시위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줬다. 위계 없이 작동하고 구시대의 언어 없이 작동하는 새로운 언어. 이 언어가 언제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는 바뀌었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건 우리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러니 정국 안정이나 평화시위 같은 말은 믿지 말자.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질서정연하고 안정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무질서로 무너지는 것이다.

 

3

 

나는 201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탄핵은 가결됐고 헌재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광화문에서는 9차 촛불시위가 한창이고(사람들은 무려 9주째 주말을 반납하고 있다. 정부는 나중에 이를 보상해야 할 것이다) 덕수궁에서는 맞불 시위를 한다고 한다. 청문회는 5차까지 열렸고 보는 내내 인간의 지적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무한히 거듭되는 두가지 아포리즘. 1.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수전 손택) 2.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고 분노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익숙해지고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칼 맑스)

 

오늘 시위를 가야 할까. 박근혜정권 뒤에는 어떤 정권이 올까.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별게 아니다. 무상교육이나 기본소득, 검찰개혁이나 재벌해체 같은 구체적인 사안이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상식적인 절차를 밟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박근혜나 최순실 등이 처벌을 받아도 한국은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림살이가 피게 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서울의 교통체증이 나아지거나 택시를 잡을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국민연금을 받는 노년이 올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남녀평등이 실현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국회의원들이 똑똑해질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내 책이 많이 팔릴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지난주에 산 19만원짜리 바지를 입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세일해서 19만원인 바지다). 광화문에서 책을 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전시를 구경하고 싶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파주에 사는 선배는 가족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가했고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밤에는 온수풀에서 아이와 함께 놀았는데 실수로 바지에 핸드폰을 넣고 들어가는 바람에 손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정부는 이것도 보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호명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도 모르게 헬조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고 엄마의 생일이기도 하다. 시위 가는 길에 선물을 사야겠다. 아니, 선물 사러 가는 김에 시위도 갈까.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둘 모두다.

 

정지돈 / 소설가

2017.1.4. ⓒ 창비주간논평  *이 글의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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