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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떼스 『돈 끼호떼』

정영수

문학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의 탄생

-세르반떼스 『돈 끼호떼』(전2권), 창비 2012

 

 

don돈 끼호떼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은 듯하다. 그것을 알고 싶다면 장장 천육백팔십사면(창비세계문학판 기준)에 달하는 길고 긴 여행에 동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우주적인 운으로, 심지어 돈까지 받으면서 두달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끼호떼』만을 읽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자랑이냐고? 이런 걸 자랑하지 않는다면 뭘 자랑한단 말인가) 그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모험이 생각보다 더 괴상하고, 우습고, 슬펐다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꿈꾼 몽상가

 

세르반떼스(Miguel de Cervantes)의 『돈 끼호떼』(Don Quijote, 1605, 한국어판 민용태 옮김)는 자타가 공인하는 다독가인 시골 양반 알론소 끼하노가 기사 소설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 방랑기사가 되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성에서 정식으로 기사 서품을 받은 뒤 둘시네아라는 귀부인을 마음에 품고 싼초라는 충실한 종자와 함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모험에 나선다. 문제는 그가 서품을 받은 곳이 성이 아니라 주정뱅이들이 모인 객줏집이고 둘시네아는 귀부인이 아니라 가난한 농부의 딸이며 충실한 종자인 싼초는 충실한 건 사실이지만 평생 농사일만 해온 ‘촌놈’이었다는 것이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1권 47면)졌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대망상증 환자인 돈 끼호떼의 탄생이다.

 

『돈 끼호떼』를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들 한다. 어떤 것이 최초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무언가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돈 끼호떼가 방랑을 떠난 1600년대는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새로운 시대에 십자군전쟁 때나 사용했을 법한 갑옷을 입고 기사도를 주창하는 그는 마치 중세의 화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광기어린 모습은 중세와 근대 두 세계 사이의 충돌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것인 듯도 하다. 하지만 그를 오로지 중세에 대한 노스탤지어만을 간직한 인물로 보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는 중세가 아니라 사랑과 낭만 그리고 모험이 있는 세상을 원했으며 그런 세상은 애초에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꼰대’가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을 꿈꾼 몽상가였던 셈이다.

 

돈 끼호떼라는 이름의 세계

 

앞에서 이야기했듯 『돈 끼호떼』는 천육백팔십사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어떻게 이렇게 긴 이야기가 다 있을까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정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돈 끼호떼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미친 소리를 한다. → 그들은 잠시 겁에 질리지만 곧 그가 미쳤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사람들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척하다가 골탕을 먹인다. → 싼초가 만신창이가 된 주인을 붙잡고 통곡한다. → 돈 끼호떼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미친 소리를 하고…… 싼초는 또 통곡을…… 뭐 이런 식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그의 수난을 지켜보고 있자면 마치 부조리극이라도 감상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부조리극의 핵심은 반복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만큼 했으면 그도 정신을 차릴 법하지만 끝까지 ‘미친 짓’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둘시네아의 사랑을 얻거나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끝없는 고난을 겪는 게 그의 목적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반복되는 그의 수난은 우습지만 어딘지 숭고한 면이 있다. 온몸을 던져 자신의 세계를 증명하려 하는 그의 광기를 보면 저절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마치 장엄한 희생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던 2천년 전의 누군가처럼 그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면 과도한 의미 부여일까?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부에서 그가 제정신을 되찾았을 땐 반가운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든다. 돈 끼호떼는 그의 친구들인 이발사와 신부, 싼초와 조카딸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미치광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정신입니다. 나는 라 만차의 돈 끼호떼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말했듯이 착한 양반 알론소 끼하노올시다.”(2권 854면) 그의 말이 슬픈 이유는 그 말이 그저 한 미치광이가 제정신을 차린 일이 아니라 돈 끼호떼라는 한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당무계한 행동을 하거나, 앞뒤 가릴 것 없이 돌진하는 사람을 두고 종종 돈 끼호떼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어느 때는 돈 끼호떼가 되어라,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아마 그처럼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라는 뜻일 것이다. 안정이 가장 큰 미덕이 된 이 사회에서 그런 말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과는 별개로, 나는 돈 끼호떼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간의 한 유형이나 행동양식 같은 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돈 끼호떼는 차라리 하나의 세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온전하다고 믿는 어떤 세계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돈 끼호떼의 세계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정영수 / 소설가

2015.1.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