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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백년이라는 것

고은

고은 / 시인

지난여름 만났을 때 둘 사이에는 소주가 있었소, 그래서 둘은 셋이 되었고 그 셋은 끝내 하나가 되고 말았소. 인상적이었소. 이장욱 형. 그날 나는 좀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었으나 제한된 사정에 따랐소.*

장욱 형. 올해는 우연찮게 한국 현대시 1백년이라는 시점의 뜻을 새기는 해이기도 했소. 1908년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것을 현대시의 원표(元標)로 산정한 바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는 관행은 이제 자연스럽기까지 하오. 이 시가 작자 자신의 떳떳한 작품일 수 없다는 사실은 행여 영국 낭만주의 시의 한 모작(模作)이라는 혐의 때문인지 모르거니와, 정작 작자 자신도 최남선이라는 작자의 이름을 양심 밖에서 오금박지 않았던 것이오. 

나는 이 시가 대뜸 바다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하오, 이것은 그가 쓴 기미독립선언서의 첫머리 “아 안전에 신천지가 개하였도다”만큼이나 장엄한 정서를 불러내고 있는지 모르오. 그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바다란 ‘웬 바다?’로 낯설고 갑작스러운 것이었소. 사실 그때까지의 한국 한시나 가사, 민요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노래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소. 황진이의 시조 ‘일도창해(一到滄海)’에서처럼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관동별곡>의 차경(借景)으로 그것이 삽입되고 있지만 그것은 입만 열면 쏟아져나오는 온갖 산골짝과 사래 긴 밭과 하천들에 견줄 수 없는 것이오.

고대 중세의 해양활동이 금압된 조선 성리학 사회에서의 산수풍류란 사대주의의 한 충성스러운 형식이기 십상이었소. 아니, 이런 사정은 지배언어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느새 민간영역에도 질펀하게 새어나간 것이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 사람들조차 정작 바닷가는 천한 지대이고 좀더 산쪽에 이룬 마을을 귀한 지대로 여겼소. 요컨대 임진왜란 이후의 배타적 유교는 아예 바다를 금단의 공간이자 천박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소. 이런 전근대사회의 풍토에 맞서 감연히 바다가 선포된 것이 한국 현대시의 첫걸음인 셈이오.

또한 그 바다는 육지에 대한 저항의 개막만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체험에 임박한 세계이고 그 세계의 구체화가 곧 서구였던 것이 틀림없겠소. 얼마 전까지 척화(斥和)의 국시였던 쇄국 또는 국수(國粹) 그리고 오랜 사대체제로서의 육지사관인 화이론(華夷論)으로부터의 탈출이 그런 바다의 선포로 결행된 터이오.

바로 이같은 서구의 근대형식은 형식만의 이식이 아니라 그 형식이 요구하는 내용에의 전환도 동행한 것이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가능성인지 모르오. 이로부터 ‘바다’야말로 한국 현대시의 집이고 길이며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내일의 어느 지점으로 이어지는 수평선 너머였소.

바로 이런 가없는 세계 앞에 선 인간 존재는 노련한 수부(水夫)가 아닌 한낱 소년이었고 그 ‘소년’이야말로 한국 현대시의 미성년적인 초기성(初期性) 그것을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라도 짐작할 만하오. 오늘날의 의성어 ‘철썩철썩’이 아닌 그 조선시대 의성어의 궁한 표기인 ‘터얼썩 터얼썩’의 파도 형상화 자체부터가 과거의 수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민이 담긴 충정의 표현이오.

하지만 그 바다의 역동적인 동작이야말로 한 소년에게 청운의 기상을 익히는 일과 새로운 삶의 궤적을 담보하는 일이기도 하오. 소년은 청년이 아니고 장년 노년이 아니오. 소년은 어디까지나 미성년이오. 집을 나가자마자, 바닷가 포구를 벗어난 난바다에 이르자마자 미아가 될 수 있고 바다의 어느 파도 이랑을 무릅쓴 실종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오.

바로 이런 생존 보장이 배제된 낯선 세계의 위기에 그 미성년은 장차의 성숙한 운명에 닿아 있는 자신의 생명을 내건 것이오. 이 시세계야말로 우연히도 한국 현대시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출범을 필연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소.

장욱 형. 이런 진술은 내가 지나치게 소년의 등장을 확대해석한 혐의도 있겠으나 현대시 1백년의 기점 이래 1백년의 시적 성취를 돌아다볼 때 불가피한 의미망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장욱 형도 이해할 것이오.

시의 모작 자체가 이미 한국 현대시의 서구시 수용 내지 이식과정의 모작성에 닿아 있으며 그렇게나마 이제까지 고착되었던 전통시가 형식의 외형적 타파를 가능케 한 것이 우리 현대시의 숙명인지 모르오. 더구나 그 행위는 서구가 아닌 서구화된 일본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오. 어떤 점에서는 원형도 없는 의제(擬制)를 원형으로 삼은 셈이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김소월에 오면 그 민요적인 체질정서와 근대시의 내재율이 만난 경이적인 낭송세계의 운율이 실현되고 1930년대 정지용에 오면 근대언어의 절묘한 체득이 있게 되오.

물론 현대시 1백년의 전기간이 시의 충만을 성취한 것은 아니오. 그 기간의 절반 가까이는 시행착오의 되풀이와 정체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오. 한국의 근대가 식민지시대라는 타율로부터 내심으로 당당한 것이 아니고 그나마 그 후반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각각의 적대적 억압체제라는 환경을 견디어내야 했던 사실을 감안할 까닭이 있겠소.

게다가 한국시의 조건에 끊임없는 서구시 콤플렉스가 작용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오. 70년대 한 문학계간지 창간사는 노골적으로 후진국의 문학을 자처한 적도 있었소(물론 이 창간사는 논란 끝에 폐기됐지만 말이오). 당시의 시단 속담은 ‘춘향전은 모르면서 엘리엇만 입에 달고 다닌다’였소.

이런 날들의 시적 행태가 이제 1백년을 맞이할 때의 자기성찰에서는 퍽이나 자존의 자세를 갖춘 것을 실감하오. 장욱 형과의 대담에서 우리 둘 다 서구시 열등의식은 이제 없다는 점검에 합의한 것도 둘만의 몫이 아닐 것이오.

이런 영광스러운그것이 갖은 시련을 넘어온 바에 의해서 더욱 영광스러운1백년의 시적 공적에 나 자신의 겸손이 마땅하지만, 이와 반면 나는 1백년의 공적 그 이상의 단계를 꿈꾸고 있소. 이는 1백년 속의 명시들에 대한 공감과 경의는 사실상 그 공감과 경의보다 더 드높은 시정신의 고처(高處)를 그것들이 차단해버린다는 사실의 발견이기도 하오.

그래서 한편의 시에 박수를 치는 나머지 그 시의 경지에 내가 갇혀버리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새로운 오만을 내세워 내 겸손을 사절하는 것이오. 이를테면 이상 서정주 백석들은 이로부터 결코 한국 현대시의 절정이 아니겠소.

지난 1백년에 대하여 앞으로 올 1백년은 어떤 시범과 기율에 머물지 않는 시의 무시무종성(無始無終性)과 시의 해방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적 층위를 내면화해야 할 것이오. 과연 1백년 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세계–서구–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1백년 후의 시는 나 자신과 세계의 준엄한 종합을 통해서 깨닫는 새로운 시세계의 최고형태일 것이오.

그러므로 이로부터의 시적 고뇌는 지난 1백년의 제물(祭物)로서의 실패나 엉터리 행태 그리고 주변화의 생존들로 고달팠던 것보다 훨씬 더 자기희생적인 아픔을 필수로 삼아야겠소.

장욱 형. 형에게 이 짤막한 편지 끄트머리에 한마디 덧붙이오. 다음과 같소.

한국 현대시 1백년의 의미 차라리 무의미이다. 나에게는 시를 쓸 때마다가 시의 원년이다. 왜 내가《초사(楚辭)》의 굴원 이후의 시인인가. 왜 내가 사포(Sappho) 이후의 한 시인인가. 나는 그 누구도 내 앞에 있지 않는 허허망망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일엽편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작은 끝의 시작이다.

내가 먼저 태어났고 먼저 시를 익혔다는 사실도 장욱 형에게 내세울 이유가 없소. 근원에서는 나와 장욱 형은 동시적
인 존재이자 궁극에서는 동일률(同一律)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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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계간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고은·이장욱 대담 참조 – 편집자. 
 
2008.11.26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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