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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황정아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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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결말부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해본 적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과거 페미니즘에 눈뜬 여성들의 모토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나 자신을 비롯하여 이런 괘씸한 결심을 품어보았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의 실제 내용은 시대와 정황과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도 굳이 어떤 전형을 추출한다면, 엄마처럼 충분히 자기 삶을 살아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억압받으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그랬기에 딸들의 그와 같은 배은망덕한 선언에 엄마들은 전통적으로 ‘나처럼이라도 살기 쉬울 줄 아느냐’보다는 ‘그래, 나처럼은 살지 마라’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

 

아버지를 대상으로 이런 결심을 한 경우, 역사적으로 그 전형적 의미를 추출하려면 더 과감한 일반화가 필요하다. 한층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기회가 아버지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편리하게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타자’나 ‘상징질서’와 이어진 아버지 개념이다. 현실의 아버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이 어떠하든,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란 역시 질서나 권력, 세상 돌아가는 이치,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왔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 역시 이런 상징적 의미라는 각도에서 설명될 여지가 많다.

 

지금 상영 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감독 코레에다 히로까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영화의 제목을 보며 짧은 한숨이 나온 건 이런 사정에서였다. 또 아버지라니, 게다가 아버지가 된다니. 코레에다 감독은 묵직하든 사소하든 주제를 정서적으로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여기서 ‘정서적’이라는 수식어는 모든 것을 정서의 분위기로 편안하게 감싼다기보다 의식을 거쳐 정서까지 주제를 전달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본 사람이라면, 난데없이 방치되어 가장 노릇을 하고 급기야 죽은 동생을 가방에 넣어 묻어야 했던 열두살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도대체 이것이 사회인가’ 하는 질문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경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현실로 닥친다면 참으로 곤혹스럽겠고 가공의 이야기라 치면 다분히 막장드라마적인,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문제를 그린다. 코레에다 감독은 대개 어머니들의 고통이 전면에 나서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 촛점을 아버지로 옮겨놓는 방식으로 ‘낳은 정 기른 정’ 식 구도의 진부함을 에두른다.

 

영화의 두 아버지 가운데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한 쪽인 ‘료타’는 성공한 인물답게 세상의 잣대를 내면화하고, 여섯살 난 아들 ‘케이타’가 오기와 야심이 없는 데 실망해온 인물이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통보에 ‘역시’라는 반응을 보인 데서 그의 됨됨이가 요약되거니와, 상대편 ‘유다이’의 집보다 형편이 낫다는 데 자만하여 바뀐 핏줄 ‘류세이’까지 아예 둘 다 갖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두 아이를 다시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그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케이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 점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료타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성찰이 필요한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을 들여다보면 이 ‘아버지다운’이라는 것이 꽤 흥미로운 이면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는, 료타가 자기 아버지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어머니와 헤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한번 제대로 놀아준 적도 없는 아버지와 료타는 아파 누웠다는 거짓말을 동원하지 않고는 얼굴 대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주제에 이 두 아버지(료타와 유다이)는 케이타와 류세이를 두고 ‘피’가 중요하다느니, 케이타가 자라면서 저쪽 아버지를 닮아갈 것이니 지금 바꾸는 게 낫다느니 하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 두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실제’ 관계와 대화 속에 ‘가정된’ 부자관계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더욱 통렬하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다. 무심코 살펴본 카메라에 케이타가 자신의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들을 발견하면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울컥 눈물을 쏟는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어, 료타는 케이타를 찾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찾아왔노라고, 절대 전화도 하면 안된다는 미션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말자며, 서투른 듯 수줍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료타는 혈연이라는 통념과 더불어 ‘약속’과 ‘미션’으로 둘러친 굳어진 역할로서의 아버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근본적인 반성의 차원을 포함하며, 이 반성이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정서로서 이루어지기에 호소력이 있다. 그렇듯 ‘상징질서’가 거기 속한 사람들에게 질서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하는 질문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지 못하는 어떤 ‘대박’의 약속과 창조의 미션도 공허할 뿐이다. 누군가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려진 철 지난 약속과 미션에 시달리는 오늘이라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더욱 와닿는지 모를 일이다.

 

2014.1.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