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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페리 『핵 벼랑을 걷다』

김연철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하여
―윌리엄 페리 회고록 『핵 벼랑을 걷다』, 창비 2016

 

 

trjk노마식도(老馬識道).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늙은 말이 길을 찾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전세계가 안개 속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길을 잃었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이럴 때 경험 많은 현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혹시 아는가? 그가 길을 알려줄지.

 

월리엄 페리(William J. Perry)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 카터 정부 때 국방부 차관을 했고, 클린턴 1기 정부 때 국방부 부장관으로 시작해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클린턴 2기 정부에서는 대북정책 조정관을 맡아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페리 프로세스’를 직접 이끌었다. 그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한 직후, “대북정책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한 말은 시간을 초월해서 유효하다. 이 책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현재의 상황에 깊은 영감을 주는 부분만 소개하고자 한다.

 

국방의 의미

 

페리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날, 경험 많은 육군 준위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 부대를 잘 돌보면, 부대가 알아서 당신을 잘 돌봐줄 겁니다.” 군대뿐이겠는가. 어떤 조직의 리더도 새겨들을 지혜다. 페리는 군대의 사기와 훈련이 군사력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군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현장방문’에서 답을 찾았다. 사병들과의 소규모 토론 기회를 자주 갖고 부사관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장관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 민간자본을 유치해서 병사들과 군인가족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했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장관을 그만둘 때, 사병들과 부사관들은 그에게 “한번도 수여한 적이 없는 특별상”을 주었고, 클린턴 대통령은 페리를 조지 마셜 이후 ‘최고의 국방장관’이라고 칭찬했다. 

 

페리는 또한 군축에 적극적인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국방부 차관으로 일할 때 군사력 증강 사업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핵무기 시대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고 적극적으로 군축을 추진했다. 페리는 소련이 해체된 후 구소련 지역의 핵무기를 제거하는 ‘넌-루가’(Nunn-Lugar)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우크라이나의 핵미사일을 제거하고 격납고가 있던 곳을 폭파한 자리에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방장관과 함께 해바라기를 심었다. 죽음의 무기를 걷어내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양해를 얻어 우크라이나의 핵물질을 희석해서 미국 원자력발전소의 연료로 활용했다. ‘메가톤을 메가와트로’ 전환하는 지혜도 배울 만하다.

 

그리고 페리는 러시아 측으로부터 미국과의 핵무기감축협정(START II) 비준의 필요성을 러시아 두마에 직접 와서 연설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즉각 수락했다. 미국의 국방장관이 러시아 의회에 가서 ‘왜 핵무기를 감축해야 하는지’를 연설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정부에서 말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페리는 “핵의 위기에는 새롭고 대담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뢰야말로 외교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믿었다.

 

페리는 군인의 지지를 받았고, 무기획득체계를 과감하게 개혁해서 불필요한 국방비 지출을 막았으며, 군축과 신뢰 그리고 외교의 의미를 아는 국방장관이었다. 국방이란 그런 것이다. 병사와 장교들의 복지는 열악한데 방산비리로 국방비는 줄줄 새고, 신뢰구축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의 국방현실에서,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페리는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미사일 방어망은 망상”

 

페리는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했던 전략방위구상(SDI)을 반대했다. SDI가 미사일 방어망의 원조이기에 그의 반대 논리는 현재 우리의 ‘사드 도입 논쟁’에 시사점을 준다. 페리가 미사일 방어망을 비판한 이유는 ‘실효성이 없으면서 새로운 핵무기 경쟁을 촉발한다’는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페리가 주목한 것은 가정의 오류다. 미사일 방어망은 제작해서 배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상대는 그 시간 동안 얼마든지 방어망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나아가 언제나 상대는 방어망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무력화 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표적의 수를 늘려 분별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동시에 상대가 다탄두를 활용하거나 궤도를 불규칙적으로 만들어버리면 방어망의 가정은 소용이 없다. 남는 것은 핵무기 경쟁뿐이라고 페리는 경고한다.

 

페리의 설명 중에서 정말 가슴에 와닿는 것은 방어에 대한 개념이다. 그는 핵전쟁시대의 방어는 고전적 의미의 방어와 개념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는 핵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망상이고 자기기만이라고 비판했다. 핵전쟁은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드를 도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한다. 페리는 카터 정부의 국방차관으로 상쇄전략, 즉 소련의 재래식 전력의 양적우위에 맞설 수 있는 국방현대화를 책임졌던 사람이다. 스텔스 폭격기가 바로 그의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안보 개념으로 핵전쟁시기에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하여

 

페리는 말년에 근본적인 ‘철학적 전환’을 이룬다. 핵위험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그는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핵의 위험을 줄이는 한정된 목표도 결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화당 출신인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그리고 민주당 출신인 페리와 샘 넌 등과 함께 초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페리는 이 회고록에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담담하게 적고 있다. 우선적인 출발은 핵전쟁에 대한 우려다. 그는 “상대편의 의도를 잘못 알아서 군사충돌이나 심지어 전쟁이 발발한 예는 역사에서 넘치도록 많다. 그런데 핵의 시대에 그런 오판은 상상할 수도 없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안도 흥미롭다. 핵무기시대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즉 누구든지 먼저 공격하면 다 같이 죽는다고 해서 약자로 MAD, 미친 짓이라고 한다. 페리는 그런 공포의 균형이 아니라 새로운 억지를 제안한다. 즉 경제적인 상호확증파괴(MAED: Mutual Assured Economic Destruction)를 만들면 위협을 줄일 수 있다는 제안이다. 중국과 대만처럼 경제협력을 활성화해서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MAD에서 MAED로의 전환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페리는 1946년 잿더미로 변한 전후 일본에서 젊은 병사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1962년 꾸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전자방어연구소 소장으로 핵전쟁의 가능성을 체험했으며, 냉전시대의 핵무기경쟁을 지켜보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핵무기가 우리[미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핵무기가 다시는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고록의 마지막 문장으로 1950년 12월 윌리엄 포크너의 노벨문학상 수락연설을 인용했다. 핵무기가 인류를 파괴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들 때마다 이 구절을 되새겼다고 한다. “인간이 단지 견디어낼 뿐 아니라 이겨내리라 믿습니다.”(번역은 평자 수정―편집자) 이 땅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김연철 /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2017.1.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