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모두를 위한 개막식

정윤수

정윤수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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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그렇듯이, 그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은 언제나 국가주의의 경연장이 되어왔다. 1896년 1회 대회 때 그리스의 국왕 조지가 개막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화해’나 ‘친선’이라는 수사를 고명처럼 얹은 올림픽의 국가주의적 개막식은 날로 팽창해왔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는 무려 3천여명의 합창단이 히틀러를 위해 노래했고 1964년 토오꾜오올림픽 때는 히로시마 원폭투하 때 태어난 사람이 성화의 최종주자였다. 두차례의 반쪽 올림픽을 거친 후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은 개발도상국이 자국의 민족주의적 아이콘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열렬히 펼쳐낸 대회였다.

 

그 결정판은 2008년의 베이징올림픽이다. 직전 대회에서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이, 자국의 근현대사의 비극이나 아픔을 고대신화를 소재로 한 장려한 아름다움으로 잠시나마 가려보고자 한 것에 비해, 베이징은 태산이 솟아오르고 장강이 흘러 넘치는 ‘대륙굴기’의 근육질 넘치는 중화주의를 맘껏 표출했고, 그래서 싱거웠다. 장 이머우 감독은 비둘기로 평화를 노래하고 아이들의 합창으로 미래를 예찬하는 식의 진부한 연출을 엄청난 규모의 인원과 압도적인 스케일로 얼버무렸다.

 

올림픽 개막식의 두 극단, 베이징과 런던

 

중화주의의 깃발이 펄럭거린 베이징의 개막식은, 중국의 체조 스타 리 닝이 마치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장면처럼 허공을 밟으며 성화에 불을 피우는 등의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결론은 중화주의였다. 100여년의 올림픽 개막식이 결국 그 나라의 국가주의적 상징을 집대성하여 펼쳐내는 공간임을 그들은 여실히 입증했다. 그래서 지루했다. 지나치게 호사스럽게 치장한 결혼식장의 뷔페 음식 같았다.

 

그랬는데, 이번 대회는 조금 달랐다. 우선 첨단 디지털 프로젝션 같은 시청각적 스펙터클이 크게 줄었다. 베이징에 비하여 오히려 아날로그적이었다. 농촌 풍경이 산업화의 공장지대로 바뀌는 장면에서, 출연자들은 경기장에 잠시 깔아놓았던 잔디를 둘둘 말아서 들고 나갔다.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일종의 자신감마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레이저쇼나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순식간에 시공간을 이동하는 깜짝쇼 같은 것을, 개막식 연출자 대니 보일 감독은 사양했다. 컴퓨터 그래픽은 최소한도로 사용되었다. 역대 대회 때마다 시상식에서 메달을 들고 서있는 여성들이 ‘늘씬한 미녀’였으나 이번 대회에서는 ‘평범한 여성’들이 보랏빛 옷을 입고 서있는 것과 ‘맥락’이 일치하는 연출이었다.

그 대신, 대니 보일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택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더 템페스트>의 대사 ‘두려워하지 마라. 이 섬은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를 시작으로 비틀스의 <헤이 주드>로 마무리되었지만, 개막식 전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정신이 지배했다.

 

개막식 전체에 흐르는 블레이크 시

 

우선 개막식 앞부분에서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의 풍광이 보이고 이를 배경으로 각 지역의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바로 블레이크 시를 바탕으로 한 <예루살렘>이다. 산업혁명을 침통한 시선으로 바라본 블레이크의 시에 곡을 부친 <예루살렘>은 19세기 중엽에 영국 사람들이 국가로 채택하자고 운동까지 벌인 바 있다. 개막식 후반에 리버풀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런던심포니를 지휘하여 영화 <불의 전차> 주제곡을 연주했는데(대회 시상식 테마곡으로도 쓰인) 이 곡의 제목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역시 블레이크의 시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아득한 옛날 저들의 발길은

잉글랜드의 푸른 산 위를 거닐고

신의 성스러운 양이

기쁨의 풀밭 위에 보였네

구름 낀 산 위로

성스러운 얼굴도 빛났을까

여기 이 어두운 악마의 맷돌 사이

예루살렘이 세워졌을까

 

런던 앨비언 태생인 블레이크는 1769년에 세워진 앨비언 제분소를 보며 성장했다. 산업혁명의 주인공인 증기기관 발명자 제임스 와트가 버밍엄의 공장주 매튜 볼튼과 합작으로 세운 이 제분소는 전통의 가내 제분소를 몰아낸 공장식 생산의 상징이었다. 블레이크는 이 거대한 ‘악마의 맷돌’을 비참하게 묘사했고 이를 받아서 칼 폴라니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마저 거대한 물신의 맷돌로 파괴시키는 자본주의의를 해부한 책 《거대한 전환》의 2부 1장의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개막식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으로 블레이크 시를 선택한 대니 보일의 연출은 산업혁명의 거대한 공장 굴뚝을 묘사하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국내 방송사들은 이 장면을 ‘산업혁명으로 인류 생활을 바꾼 영국의 자부심의 표현’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대니 보일의 생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진부한 이해다. KBS <뉴스9>는 심지어 “거대한 굴뚝들이 솟아오르고 산업혁명의 힘찬 고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런던의 수많은 굴뚝과 그것을 청소하는 어린아이의 비참한 삶을 통탄했고 대니 보일의 연출 지시에 따른 수많은 출연진 역시 시종 침통한 표정으로 블레이크의 정신을 재현했다.

 

제국의 영광 대신 민중의 희로애락 그려내

 

대니 보일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전쟁의 기억을 생략하는 대신 19세기의 여성참정권 운동이나 1936년 대량실업 상황을 묘사했고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묘사하는 대신 자메이카 등지에서 대량 유입되는 이주민의 지친 표정을 재현했다. 이를 두고 집권 보수당의 애이단 벌리 의원이 “가장 좌파적인 개막식”이라고 비난했지만 대니 보일은 각 소재들은 “예찬할 만한 훌륭한 일이며 그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 상징들이 온갖 첨단 기술로 재현되고 과도한 국가주의가 화려한 불꽃쇼로 치장되어 자화자찬의 과장된 퍼포먼스로 일관되어온 기존의 개막식에 비추어 볼 때 확실히 대니 보일의 개막식은 ‘제국’의 다른 ‘훌륭한 일’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이 “가슴 벅차고, 위트있고, 장대하면서도 사려깊고, 감동적인 개막식”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대니 보일이 선택하고 재현한 요소들은, 그의 말처럼 ‘지지할 만한 훌륭한 일’들이었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서평집 《반대자의 초상》에서 “한 국가의 역사는 교향곡이나 연속극이 아니듯이 플롯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어떤 일관된 민족주의적 흐름을 타고 한 나라의 역사가 빨랫줄처럼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기존 개막식(특히 서울올림픽과 베이징올림픽)의 관념이었다면 대니 보일은 “영국 역사에는 조형의 의도라는 게 없으며 대영제국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업적을 휘리릭 만들어내놓은 것이 아니다”라는 테리 이글턴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대니 보일은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까지 당대성을 지닌 가치들을 선택하였고 그것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현했다.

 

‘좌파적 개막식’ 논란 잠재운 과감한 연출

 

두루 얘기한 바와 같이 그것은 노동에 대한 존중, 더 나은 삶을 위한 헌신, 그것을 가로막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요약된다. 이런 측면 때문에 ‘좌파적인 개막식’이라는 비난을 듣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번 개막식의 주제이기도 한 ‘이것은 모두를 위한 것'(This is for everyone)이다. 그런 뜻에서, 블레이크는 오래전에 <예루살렘>이라는 시를 썼던 것이다.

 

나에게 이글거리는 황금의 활을 다오.

나에게 열망의 화살을 다오.

나에게 창을 다오; 구름아 걷히거라.

나에게 불의 전차를 다오.

나는 정신의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나의 칼이 손에서 가만히 잠들게 하지 않으리라.

 

2012.8.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