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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복종한 자는 더더욱 복종하게 되리라

황정아

 

황정아

황정아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가상적 상황을 그린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복종』(한국어판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2015)은 마침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빠리에서 『샤를리 에브도』 지(紙)를 공격한 1월 7일에 출간되어 관심의 초점이 된 바 있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빠리에서 다시금 경악스러운 테러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이 소설은 존재 자체로서 스캔들이 되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지금 유럽의 정치적 무력함을 반영한 소설

 

물론 이 책에서 집권당이 된 ‘이슬람박애당’은 테러리스트 정당이 아니며 대통령 모하메드 벤 아베스는 “어떤 의미로는 드골의 야심, 프랑스의 위대한 친아랍 정치가의 야망을 답습”(191면)하면서 유럽연합을 남쪽으로 확대하여 로마제국을 모델로 한 이슬람제국 건설을 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이 알게 모르게 이슬람의 위협을 과장하고 이슬람 혐오를 부추긴다는 비판은, 그런 유의 비판이 대개 그렇듯이 적용범위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는 반면 비판으로서의 정확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여기서 이슬람박애당의 득세는 기존의 정치지형이 도달한 총체적 난경 혹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대안 없음의 결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 소설이 어떤 두려움이나 혐오를 부추긴다면 그 대상은 미래에 가능할지 모를 유럽의 이슬람화라기보다 현재 유럽이 봉착한 정치적 무력함이다.

 

이 무력함은 정치가 실질적인 선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상투적인 “좌우 대립 구도의 정치게임”(176면)이 된 데서 잘 나타난다. 문제의 해결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은 곧바로 문제 자체에 대한 피로감을 조성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몇 달 전부터 중도좌파 언론의 태도가 변했다. 그들은 파리 변두리의 폭력이나 민족 간의 분쟁에 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침묵 속에서 지나갔다. 심지어 [이슬람 이민자들과 서구 유럽 출신들 간의 내전을 예언하는] ‘카산드라들’을 비판하는 것도 멈추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침묵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대부분이 이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피로해하는 듯했고, 내가 교류하는 세계에서는 이 피로감이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졌다.(66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변화

 

이슬람박애당은 무엇보다 이런 피로감을 타고 급부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그렇다고 이 정당이 막연하게만 묘사되지 않는 점이 이 소설의 또다른 미덕이다. 결선투표에서 극우파 국민전선과 맞붙게 된 이슬람박애당이 사회당을 비롯한 좌우파 모두의 지지선언을 확보하는 경위는 상당히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다시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이슬람박애당 리더의 진짜 천재성은 무엇보다 그가 선거의 승부는 경제 영역보다는 가치관 영역에서 판가름됨을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 역시 우파가 이길 것이 확실시되는 ‘이념전쟁’이었다. 게다가 전투조차 하지 않고서 말이다. (…) 벤 아베스는 이슬람 율법의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복원시켰고 거기에 더해 이국적 향취까지 불어넣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가족이나 전통적 윤리, 그리고 암묵적인 가부장제 복원의 길이 벤 아베스 앞에 활짝 열렸다. 우파, 그리고 극우 국민전선으로서는 더더욱 들어설 엄두도 낼 수 없는 길이었다. 사회적으로는 힘을 잃었지만, 미디어의 세상으로 피신하여 시대의 불행과 나라 전체를 잠식한 ‘구역질나는 분위기’에 대해 쓴소리를 퍼붓는 최후의 68세대, 가사상태의 진보주의 미라들에게 반동적이고, 나아가 파쇼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그 길은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벤 아베스만이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다. 그의 태생적 반인종주의에 발목이 잡힌 좌파는 처음부터 그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고, 심지어 그를 들먹거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185~86면) 

 

그러니까 현 정치의 무력함으로 성장한 이 정당에 권력을 선사한 또다른 조력자는 바로 어떤 비겁함이었다. 정교(政敎)일치지만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관용이 있고, 여성에 대해서는 모든 중요한 공적 직무를 박탈하겠지만 때려죽이기까지는 않는 선에서, 이 소설의 화자 같은 인물을 포함하여 특별히 종교적이지도 또 특별히 남녀평등을 고집하지도 않는 이들은 충분히 타협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도 아니고 자살폭탄테러도 아닌, “따지고 보면 진짜로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134면)을 주는 세력이니 뭐 어떻겠는가,라는 식이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자기 분야에서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 진짜 학자이고 교육에 대한 소명은 별로 없어도 분명 교수로서도 그리 빠지지 않을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 학문이란 이미 ‘진리 추구’ 비슷한 것도 아닌, 그냥 자신이 잘할 수 있고 때로 기쁨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마저도 이미 정점을 지나쳤다는 느낌이다. 정치는 그저 선거철에나 볼만한 오락거리일 뿐이다. 좌파적 비판이나 우파적 믿음, 그 어느 것도 현재라는 교착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게 그에게도 너무 분명해 보인다. 서구인답게 확고한 개별성에 대한 믿음은 어떤가? 이 또한 고독 앞에서 언제든 흔들리는 아슬아슬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적인 차원, 말하자면 종교적인 차원은? 이슬람박애당의 임박한 승리 앞에서 그는 자신이 전공한 작가 위스망스의 자취를 쫓아 가톨릭을 통해 이 차원과 접속해보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냉정한 깨달음에 이른다. 

 

현실에서는 『복종』에 그려진 이슬람정권의 등장보다 테러를 빌미로 이슬람인 전체에 대한 박해와 차별을 강화하는, 곧 9·11 이후 미국이 간 길을 뒤따를 것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 그러나 실상 이 소설에서도 정치적 개연성이 핵심은 아니다. 현실정치의 차원으로 생각하면 이 소설이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는 면은 무수히 많다. 이슬람박애당이 추진하는 ‘분배주의 ’적 경제개혁이 과연 현실성을 갖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직업을 빼앗긴 채 ‘일부’의 ‘다처’가 되어야 하는 상황을 여성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의문을 이 소설은 제기하지 않는다.

 

복종하는 사회의 우울함

 

이 소설이 제기하는 통찰의 핵심은 앞서 인용한 대목에도 나오다시피 ‘가치관 영역’과 관련된다. 빠리 테러 이후 고개를 쳐드는 혐오와 차별에 맞서 환기되는 ‘프랑스적 가치’를 생각해보자. 자유, 평등, 박애의 이 가치가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키려는 사람들의 생각만큼 잘 작동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으리라는 데 현실의 가장 큰 난관이 놓여 있다. 다시 소설의 주인공으로 돌아가면, 이 서유럽 지식인 남성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기존의 시스템이든 변화된 이슬람적 시스템이든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 만큼은 제공해준다. 그는 소설의 화자로서 가령 “이미 정립된 사회시스템 속에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스템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것을 파괴하려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65~66면)임을 지적하는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이런 규정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가 이슬람으로 ‘영혼 없이’ 개종하여 대학에 복직하는 것이 ‘복종’이라면 이 복종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다. 우엘벡은 ‘가치’의 영역에서 드러난 이 철저한 무력함이 정치사회적 진퇴양난과 결합된 근미래를 아무런 환상 없이 그려나간다. 자기풍자도 분명 들어 있을 이 글쓰기 곳곳에 배인 작가의 우울함은 읽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복종』이 다루는 주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나 조르죠 아감벤(Giorgio Agamben),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보편주의’의 회복을 위해 왜 하필 기독교 전통에 눈을 돌렸는가, 그러면서도 왜 기독교 재해석을 무신론의 지점까지 끌고 갔는가가 비로소 온전히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각 문화의 깊은 토대를 구성하는 종교나 가치의 차원을 덮어두고서는 우리 시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그렇듯 제각각 특수한 종교와 가치로부터 출발하면서도 지향점은 분명 보편이어야 한다는 것, 요컨대 다문화주의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방향에서 이슬람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분명히 있을 터, 『복종』이 어쨌든 반(反)이슬람의 효과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시도에 관한 탐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에 앞서 『복종』에 그려진 사태가 ‘이국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점이 무엇보다 섬뜩한 느낌으로 남는다. 이미 복종한 자는 더더욱 복종하게 되리라는 것은 오늘 여기서도 예감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5.11.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