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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시 읽기의 즐거움: 나의 한국 현대시 읽기』

황규관

히드라의 ‘두 머리’
–이시영 『시 읽기의 즐거움: 나의 한국 현대시 읽기』, 창비 2016

 

 

rejerj시인의 산문은 시로 다 쓰지 못한 나머지 언어라고 말해지곤 한다. 이런 통념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인의 산문은 시와는 다른 영역의 글쓰기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시와 심층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비유하자면 시인이 갖고 있는 내면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냇물과 바람 같은 관계이다. 그래서 한 시인의 정신을 온전히 읽으려면 그의 시와 산문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시와 산문을 동시에 읽어야 할 시인이 있지 않은가. 김수영 말이다.

 

시인 이시영의 산문집 『시 읽기의 즐거움: 나의 한국 현대시 읽기』가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의 산문’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경우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제목에 여실히 드러나듯 이시영이 ‘시인으로서’ 읽은 ‘한국 현대시’에 대한 단상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읽기의 즐거움』에는 어떤 척추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몇몇 주요 시인들을 통한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짚고 있는 것 같지만 시인 자신의 내면에 주름 잡힌 한국 근대사에 대한 자술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시인의 회고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나의 문학적 자전」(이하 ‘자전’)인데, 이 범상해 보이는 회고담은 사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고백건대 나는 이 글을 처음 읽을 때 다시금 시인이 쓸 수 있는 산문에 대해 약간 진지한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 읽는 나를 압도한 것은 개인사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는 서사의 근육이었다. 오늘날 시인의 산문이란 것이 일반적으로 왜소해진 자아의 일방적인 읊조림에 지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 ‘자전’은 시인 이시영이 몸소 겪은 한국 근대사를 강렬하게 응축시켜 놓은 글이다. 이 책이 이시영이 시인으로서 남긴 짧은 시비평서라는 굴레를 넘어선다면 그것은 아마 이 ‘자전’ 때문일 것이다.

 

이 ‘자전’을 등뼈 삼아 책 전체를 재구성하면 꽤나 재밌는 다른 책이 탄생하게 된다. 이 재탄생된 텍스트에서 ‘자전’ 다음으로 읽을 글은 「1970년대의 시: 신경림과 김지하 시를 중심으로」이다. 이 글도 이 책의 다른 글처럼 묵은(?) 글에 해당하지만(1990년) 지금 읽어도 그 낌새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이 글에서 이시영의 비평적 지성이 돋보이는 지점은 신경림을 19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의 전통과 연관시켜 읽는 관점이며, 다시 박노해로 표상되는 노동시의 잠재태가 신경림 시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읽어내는 대목이다. 개별 시작품에 대한 느낌에 즉하되 그 작품들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한 냉철함의 발휘는 사실 언젠가부터 사라진 비평의 덕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지하에 대한 일부 고평은 정말 지금도 유효한지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훗날 김지하가 보여준 정치적 타락에 대한 원한감정 때문이 아니다. 과연 김지하가 김수영을 극복했는가? 위 글에서 예문으로 든 김지하의 김수영 평가 자체가 지금 읽어보면 의아한 점투성이거니와 이시영도 이 의아한 김수영 비판에 기반해 김지하를 평가하고 있기에 드는 의문이다. 또 욕심 같아서는 ‘1980년대의 시’에 대한 별도의 산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김남주와 박노해, 그리고 백무산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리얼리스트의 전통을 다시 환기해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백무산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최근의 성과인 『폐허를 인양하다』에 대한 촌평에 가깝다.)

 

산문정신의 회복과 ‘시인-되기’

 

아무튼 이시영의 사적 개인사가 ‘자전’이라면 이시영의 소위 ‘공생애’는 「1970년대의 시: 신경림과 김지하 시를 중심으로」와 「우정의 발견: 창비 5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우정의 발견」은 저자의 한때 직장이었던 창작과비평사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기에 정확한 의미의 1980년대사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시인 이시영을 읽고 난 다음 읽어야 할 텍스트는 그의 문학상 수상소감들과, 『청록집』, 김종삼, 고은에 대한 소감들이다. 나는 이시영의 김종삼, 신경림, 김수영, 고은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보다 문학상 수상소감들에 더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아무래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것일 때보다 내면의 광야에서 터져 나올 때 더 진실에 직핍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수상소감들에서도 불려 나오는 시인들은 있지만 그것은 시인 자신의 육성을 위한 디딤돌 역할에 머문다. 예컨대 1996년에 작성된 지용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러한 것처럼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알 수 없는 속도감에 실려 내일을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시단 풍속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제정신을 갖고 사는 시인이 정말 필요하다”(「지용 시의 위의(威儀): 지용문학상 수상소감」)라고 말할 때, 나는 김수영의 산문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가 떠올랐다. 김수영은 그 글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미의 전신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 수상소감문에서도 이시영은 ‘진리’를 말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나무가 자신의 전력을 다해 한 잎을 머금듯 숨 막히는 온몸의 긴장 뒤에, 아니 그보다도 더한 투신 뒤에, 투신 다음의 고요한 휴지 뒤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이 진술에는 그의 “뒤늦은 스승”(‘자전’) 김수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이시영의 육성인 것도 확실하다.

 

시인에게 산문이란 무엇인 걸까. 시인에게 산문은 시의 휴지기에만 실존하는 장르나 텍스트가 아니라 시라는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활동하는 심각한 마그마는 아닐까? 오늘날 시가 사소해지는 것만큼 난데없이 난해해지는 경향들은 지표면(현상) 아래에서 암석을 녹이며 형성되는 산문정신의 부재와 관계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시인이 ‘대신’ 그리고 ‘함께’ 울어주는 샤먼이라는 인류학적 정의와 함께 근대라는 탐욕스러운 시간과 맞서는 산문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곧잘 망각하곤 한다. 그래서 오늘날 남은 것은 스타일뿐인데, 산문정신이 없는 스타일은 자본주의 상품 목록에 언제든 편입될 위기를 자초한다.

 

이시영의 『시 읽기의 즐거움』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근대의 소용돌이 같은 사건들을 그의 시가 품고 있음을 이번 산문집은 우회적으로 증명하고 있으며, 이렇게 시인에게 있어서 시와 산문은 독립적으로 서로를 비추면서 부단히 시인-되기를 감행하는 히드라의 ‘두 머리’와 같은 것이다. 

 

황규관 / 시인

2016.9.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