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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제시간과 서성임: 최정례의 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를 읽고

정홍수
정홍수

정홍수

며칠 전 국립국어원에서 짬뽕의 순화어로 ‘초마면(炒馬麵)’을 제시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원래 중국 사람들이 먹던 초마면을 나가사끼의 화교가 현지화하면서 얻은 일본식 명명이 ‘잔퐁’이고, 개항기 제물포 쪽에서 다시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현지화될 때 그 이름이 우리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이니 본적을 찾아주자는 뜻인 듯하다.

 

국어원에서도 그 제안이 쉽게 받아들여지리라고 믿지는 않는 듯하거니와, 나는 소설가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감염된 한국어’가 좋다. 이달초 ‘번역’에 관한 한 공개대담에서 고종석은 번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의 감염, 문화의 섞임이 만드는 결을 옹호하는 가운데 ‘외래(外來)’라고 하는 말에서 ‘도착(來)’의 지점을 강조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그 발언이 참으로 신선했다. 어쨌든 짬뽕, 짜장면은 한 세기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인의 음식이 되었다. 그 기원과 도착, 혼성과 변형의 시간을 이름에 싣고서 말이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짜장면에 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이가 있으랴만, 어릴 때 신기했던 건 짜장면이 배달음식이란 사실이었다. 흰옷을 입고 은빛 배달통을 들고 가는 중국집 종업원을 괜히 따라가보기도 했을 테다. 앞판을 위로 쓱 뽑아 올리면 세 칸으로 나누어진 통 안에서 훅 하고 흘러나오던 냄새, 그게 내겐 짜장면에 대한 기억의 원점인 듯도 하다.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잔뜩 음식을 주문하는 장난을 상상하며 친구들과 키들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집에는 전화가 없었고, 공중전화를 이용할 엄두는 내지도 못해 사고는 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짜장면 배달부를 좋아했던 이가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정례 시인의 근작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에는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란 시가 들어 있다. 산문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시에서, 시의 화자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회한을 토로한다. 그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두가지다. 하나는 키우던 닭으로 끓인 삼계탕을 먹을 수 없다며 울던 사촌. 또 하나는 ‘짜장면 배달부’. “바퀴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배달 소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자 짜장면 면발도 덩달아 불타면서 쫓아갔다.” 그러나 그이가 그리려는 그림은 누군가가 이미 그렸으니 어쩌랴. 할 수 없이 그이는 이제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촌과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사촌은 몇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모양이다. 시의 후반부다.

 

사촌은 몇년 전에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부르기도 전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전화 받고 달려가면 퉁퉁 불어버렸네, 이런 말들을 한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짜장면 배달부는 누가 부르기 전에는 갈 수 없다. 주문전화가 와야 한다. 혹간은 장난전화나 잘못 걸려온 전화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누가 불러야 간다. (그런데 그 착한 사촌은 누가 불렀기에 그렇게 서둘러 갔나?) 그리고 누가 부른 다음에는 서둘러야 한다. 곧 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서둘러 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 짜장면 배달부는 늘 늦는다. 우리는 전화를 하고, 중국집의 대답은 똑같다. 지금 가는 중이라고. 그러니 누구든 퉁퉁 분 짜장면을 받아 든다.

 

삶과 역사를 돌아보는 ‘주체’의 시간

 

이제 우리는 시인이 왜 짜장면 배달부 이야기를 꺼냈는지 조금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 제시간이라는 게 있는 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짜장면 배달부의 고뇌는 많은 이들의 삶에서 반복된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우리는 기다림을 말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의 어떠함을 전하는 오래된 지혜의 차원일 수도 있고, 역사의 정의를 믿고 나누고자 하는 화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일 때가 많다. ‘제시간’은 대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최정례의 시에서도 사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짜장면 배달부는 삶을 환유하는 어떤 지점이 되면서 우리를 아프게 한다. ‘퉁퉁 불어버린 것’. 해서는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라고 시의 화자는 말한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두 문장을 더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서성일 수밖에”라고 했지만, 이 시적 발화에는 불가피하고 수동적인 느낌이 덜하다. 바로 앞에서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고 했기에 생겨난 무연한 홀가분함 같은 게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시의 화자는 그 ‘서성임’을 인생이나 역사의 횡포에 맞서는 자신의 자리로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이 시의 마지막과 제목에 동시에 놓이면서 무언가를 버티고 이겨내는 시의 역설이 되고 있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주체’라는 말은 역사에서도 철학에서도 너무 낡거나 혹은 너무 난해한 말이 된 느낌이다. 그러나 인생의 허무, 비애, 무의미 등등과 싸우며 얻어낸 한 시인의 통찰 덕분에 우리는 ‘짜장면 배달부’라는 애틋한 자리에서 삶이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볼 주체의 시간을 얻는다. “서성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5.5.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