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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137인과 함께 선거법을 생각한다

박성철

박성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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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가 작가들을 고발했다. 신문에 광고를 냈다는 이유로, 우리 문단을 이끄는 시인, 소설가 137명을 고발했다. 광고문은 절절한 호소였다. 강은 결코 역류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도 강처럼 흘러야 하며,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선관위는 이런 광고를 실은 게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작가들은 반발했다. 한국작가회의는 138번째 선언자가 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소설가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어떤 태도”가 고발당한 데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박범신은 “작가들 가슴에 불 지르지 말라”고 일갈했다. 신경숙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독립적인 그들이 왜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여서 작품을 쓰는 대신 시국선언의 목소리를 냈는지를 짚어보는 밝은 눈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가?”

 

작가들이 던진 화두에 답하자

 

작가들이 느끼는 당혹과 분노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선관위가 현행법상 터무니없는 고발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위와 사실관계를 모두 알지 못하면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검찰이 기소유예를 하거나 법원이 선고유예를 하지 않은 이상, 실정법상으로는 유죄로 판단될 여지가 있다. 문학인이라고 하여 법 적용에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선관위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면 작가들을 용서해달라고 선처를 호소하는 데에 그쳐야 할까. 아니다. 그건 작가들이 던진 근본 질문을 외면하는 일이다.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낡은 제도에 저항하며 시대와 불화를 겪는다. 불화 속에서 새로운 꽃을 피운다. 작가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들을 옭아맨 선거법이 정당한지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선거법이 표현할 자유, 언론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가면 좋겠다.

 

표현할 자유에 너무 엄격한 선거법

 

이를테면, 표현할 자유를 생명처럼 여기는 ‘언론인’을 아예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정하는 식이다. 공정보도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게 아니라, 언론인이라면 공사불문하고 어떤 선거운동도 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입법례는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멕시코 등 민주주의 국가 어느 나라 법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국내 언론은 《뉴욕타임즈》가 오바마를 지지했다고 상세히 보도하면서도, 정작 우리 후보자에 대해서는 정정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저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눈짓하는 판토마임을 할 뿐이다. 은밀하고 교묘한 간접 표현만 횡행한다.

 

1인 미디어, SNS처럼 매체환경이 급변하는 요즘, 언론인의 범위도 명확하지 않다. 선거운동이라는 개념도 모호하다. 그런데다 언론인의 사적 활동까지도 처벌하니 선거라는 공론장 기능을 더 위축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언론이 다양해질수록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더 제한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 규율방식의 한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선거법이 선거운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뒤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형식적으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도, 정작 구체적 방법에서는 금지를 전제로 한다.

 

작가들에게 적용하려는 선거법 제93조 제1항도 마찬가지다. 매우 포괄적이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 명칭 또는 후보자 이름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그밖에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정했다. 그러면서 선거법에서 정하는 방법만 예외로 인정한다. 선거일 6개월 전부터 선거일까지 제한하는데, 보궐선거까지 포함되므로 금지기간도 대단히 길다.

 

이뿐만이 아니다. 금지조항 대부분은 “누구든지 선거법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원칙적 금지구조를 취한다.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시를 마치 위험하고 해로운 행위인 양 취급한다.

 

이런 원칙적 금지방식에서는 규제 내용이 복잡해지는 문제도 생긴다. 만일 금지되는 행위들만 명확히 열거했다면, 누구든지 그것만 하지 않으면 되겠다고 미리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행위를 여러 조항 구석구석에 흩어놓으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심지어 전문가 사이에서도 견해가 나뉜다. 선관위 유권해석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분분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려면 걱정이 앞서게 된다. 유권자는 갈피를 잡기 어려운 처벌규정 앞에서 주눅 든다. 차라리 침묵하고 만다.

 

축제를 보장하는 유권자 중심의 선거법이 되어야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올림픽, 월드컵처럼 다시 찾아온다. 다음 선거도 지금과 같은 규제 아래서 치를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언로를 막는 법 제도에서는 축제가 열리기 어렵다. 처벌을 각오한 사람들만 입을 연다면 대립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소심한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까지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화음을 들을 수 있다.

 

이제 우리도 예외로 금지되는 행위만 분명하게 나열하는 유권자 중심의 선거법을 가질 때가 되었다. 그것이 작가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2013.1.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