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과 진실의 의미

홍석률

홍석률 /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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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1일 어린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민들이 분노하여 3일 연속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4월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12년 후, 1972년 4월 장준하는 <죽음에서 본 4·19>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4·19 당시 수많은 어린 학생과 젊은이가 희생되었으나 왜 나이든 교사와 교수, 정치인, 지도층 인사들 중에선 한명도 희생자가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선포했고, 장준하는 목숨을 건 저항을 시도하였다.

 

장준하는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활동했고, 한국전쟁 때부터 《사상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처음에 그는 사무실도 전화도 없이 다방 구석에서 원고를 교정하고, 직접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잡지를 서점에 배포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전성기 때인 1950년대 말 《사상계》의 발행부수는 당시 일간신문과 맞먹었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사상계》를 끼고 다녔다. 5·16쿠데타 이후 장준하는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며 감옥에 드나들었고, 야당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서명운동 등을 벌이다가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의 1호 구속자가 되었다. 1974년 말 심장병 때문에 감옥에서 나왔지만, 유신철폐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장준하의 죽음, 다시 제기되는 의혹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 등산을 갔다가 절벽 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국은 등반 중 실족사로 이 사건을 처리했지만, 이미 그 당시부터 의혹이 제기되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1993년 야당인 민주당이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걸쳐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되어 도합 3년 동안 장준하 사건을 조사했다. 그러나 결국 사인(死因)을 밝히지 못하고,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했다.

 

최근 묘소 이장 과정에서 장준하의 유골을 땅속에서 꺼내 보게 되었다. 두개골에 둥글게 함몰된 흔적이 뚜렷했다. 장준하가 타살되었다는 의혹이 강하게 다시 제기되고 있으며,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대두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희호 여사 등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반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씨 등 일부 사람들은 그건 이미 조사된 것이 아니냐고 한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혹을 가질 만하다. 10미터가 넘는 절벽에서 추락했다는데 두개골과 대퇴부를 제외하고 갈비뼈 같은 취약한 부분에 뼈가 부러진 흔적이 없다. 최종 목격자로 자처하는 김용환은 자신과 함께 장준하가 약사봉 정상에 올랐고, 내려오다 실족해 추락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과거 여러 차례 조사과정에서 그의 진술은 일관성을 보이지 못하고 계속 오락가락했다. 의문사위원회가 현장조사를 했을 때 김용환은 장준하의 실족 지점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지적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사건 당일의 동선(動線)을 실제 따라가며 시간을 측정해보아도 도저히 그 시간에 그곳을 모두 다녀올 수 없다.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왔다

 

물론 장준하의 의문사를 충분한 권한과 시간을 갖고 재조사해도 역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그 과정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의문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한국현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마산시민의 항거가 4월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광주에서의 죽음들에 대한 항의와 그 진실을 폭로하려는 노력 속에서 1980년대의 치열한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에 항의하고 그 진실을 가리려는 움직임 속에 1987년 6월항쟁이 있었다.

 

시민들이 이들의 죽음에 무관심하고, 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진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용산참사가 있었고, 쌍용차 노조원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현장에서 용역회사 고용원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이들이 왜 죽어가야 했으며 왜 이러한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제대로 묻고 밝혀내지 못한다면, 불행은 반복될 것이다.

 

장준하의 유해(遺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장준하의 유해 발굴을 계기로 진상규명을 재시도하는 것이다. 장준하의 유골이 이미 땅속에서 드러났지만 현재까지 한 일은 전문가들이 눈으로 관찰해본 정도이다. 법의학 전문가들은 모두 엑스선 촬영, 시료 채취 및 성분검사 등 추가적인 과학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사를 의혹을 가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맡기면 모든 논란이 잠재워질 수 있을까? 어떤 형태로든 공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구의 설립과 활동이 필요해 보인다.

 

반면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 지하에 있는 장준하와 그 유족들에게 죄송한 일이지만 그의 유해를 다시 땅속에 묻고, 의혹도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분과 그 유족들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 자신이 더 걱정이다. 이러고도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을지, 민주주의 국가에 살 수 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정말 걱정되지 않을까.

 

2012.9.5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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