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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상상력’과 《핑퐁》

유희석

유희석 | 문학평론가, 전남대 교수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령에 가깝겠지만, ‘재난의 상상력’ 자체를 그 본령에 귀속시키는 어려울 것이다. 지구 종말에 경종을 울리는–얄궂게도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만들었다는–‘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1998)으로 자정 9분 전으로 앞당겨지고 9?11테러가 모든 매체를 통해 만천하에 방영된 지구 현실에서 재난의 상상력이 ‘히트 상품’이 되는 것 자체가 말세의 징후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내일이 없는 오늘을 상상하는 상상력은 특히 할리우드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여전히 잘나가는 품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핵전쟁이나 외계생물의 침략으로 지구 환경이 황지(荒地)로 전락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엔딩’에서만은 일말의 인간적인 희망과 위안을 아이러니컬하게나마 남겨놓는 것이 그 장르 특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싸운드트랙 〈우리는 다시 만나리〉를 배경으로 지구 위로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장면으로 끝나는,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라는 부제를 단〈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의 허무주의적인 파국에서조차 그런 희망을 읽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아마겟돈’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올여름 우리 극장가를 싹쓸이한 봉준호 감독의〈괴물〉도 예외는 아니다. ‘재난의 상상력'(The imagination of Disaster)이라는 제목으로 공상과학영화의 패턴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쑤전 쏜탁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우리의 시대는 진정 극단의 시대다. 똑같이 두렵지만 정반대처럼 보이는 운명들의–끊임없는 진부함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의–끊임없는 위협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 이 쌍둥이 요괴와 대적하게 하는 것은 대중예술이 대량으로 공급하는 팬터지이다. 그 팬터지가 할 수 있는 한가지는 이것이다. 즉 마지막이 행복하게 끝나는 이국적이고 위험한 상황들로의 도피를 통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에서 우리를 구출하고–실재하는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공포를 잊게 해주는 것이다.(《해석에 반대한다》)

영민한 실천적 비평가답게 쏜탁은 공상과학영화가 오늘날 우리 시대가 마주한 극단적 상황의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스크린에 온갖 형태로 투사된 악몽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가깝다”면서 글을 맺는다.

진정 ‘우리의 현실’은 그 악몽에 이미 너무나 가까이 있다. 세계로부터 ‘배제’당한 두명의 (왕)따, ‘못’과 ‘모아이’가 세계를 ‘언인스톨’하고 다시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박민규의 《핑퐁》에도 악몽의 에피쏘드들은 무수하다. “저를 포함해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안될 것 같더라구요, 인류라는 게”–《핑퐁》 출간 후 작가의 말이다. “안될 것 같더라구요, 인류라는 게”라는 인화성(引火性) 강한 생각이 재난의 상상력으로 불붙는 건 시간문제다. “이국적이고 위험한 상황들로의 도피를 통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에서 우리를 구출”해준다는 점에서도 《핑퐁》은 쏜탁이 논한바 ‘팬터지’의 한 전형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저는 인류가 사라져버린 세계에 익숙한 편입니다. 예, 자주 그런 기분이 들었죠. 아주 먼 어딘가에, 누가 뭐래도 인류는 존재하고 있겠지…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즉 그런 인류의 일상 말입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암벽에서, 혹은 눈보라 속에서 그런 건 추측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누구라도, 그걸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결국엔 이 지구가, 실은 인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싫든 좋든, 그건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그래서 사실, 저는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 편이죠. (《핑퐁》)

박민규가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를 통해 들려주는 이 말도 재난의 상상력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런 상상력에 발동을 걸면서도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 세계를 심문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희망이냐 절망이냐가 촛점은 아니다. 곧이어 작가가 덧붙이듯이 “왜, 우리가 살아왔으며… 사라진다면 왜, 사라져야 하는가”를 그야말로 기상(奇想)한 방식으로 묻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한점조차 안되는 지구라는 행성은, 그 주제에 감히 3만발의 핵탄두를 발기해놓고 있는 이 행성은 인간과는 정녕 무관하게 생성되었고 언젠가는 인간이 없는 상태에서 종말을 맞을 것이다. 핼리혜성이 이 “조까라 마이싱” 같은 행성을 가루로 날려버릴 때까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소름끼치는 핵전쟁을 무색케 하는 (왕)따들의 수난 같은 ‘진부한 일상’에 생기 넘치는 발상으로 헌신하는 작가가 우리 문단에 더 많아지기를.

2006.10.17 ⓒ 유희석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