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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의 시국선언에 부쳐

유희석

유희석 /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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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불교계가 시국선언에 동참함에 따라 천주교 및 개신교 등 3대 종파 모두가 박근혜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고 나선 셈이 되었다. 29일에는 원불교까지 동참했고, 그 파장은 예측불허다.

 

물론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한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와 ‘박근혜정부 국정운영 대전환 촉구’를 내건 불교계 사이에는 논조의 차이가 없지 않다. 그 차이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계가 교파를 초월하여 현실정치의 중대 현안에 대해서만은 한목소리를 내고 시정(是正)을 요구한 것이, 그 말 많던 이명박정부 때도 없던 일임은 환기할 만한 사실이다. 임기의 20퍼센트도 채우지 못한 새 정부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처했나.

 

박근혜정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종교계의 시국선언이 나온 배경에 이명박정부가 전방위적으로 훼손한 민주주의의 ‘기본 인프라’가 더욱 망가져가는 상황이 자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시국선언의 핵심은, 전(前) 대통령 통치행위의 불법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국정원 등 국가기관들의 대선개입 의혹을 해소하고 이들을 비호하는 검찰 및 사법부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 점을 당국자들도 아주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11월 18일 시정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정부는 내년 지방선거를 비롯해서 앞으로 어떤 선거에서도 정치개입의 의혹을 추호도 받는 일이 없도록 공직기강을 엄정하게 세워가겠습니다”라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2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전주교구 박창신 신부의 시국미사를 겨냥해 “국민들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다. 박창신 신부의 시국강론을 복기해보면 과유불급한 면이 있고 그래서 분열의 빌미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양식있는 국민들이라면 그런 지나침을 탄하기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 것으로 본다. 단순히 여당인 새누리당이 특검 수용불가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이명박정부 때의 일이다. 박근혜 당시 후보의 정치적 정체성이 아무리 ‘이명박근혜’였다 해도 국정원 등과 한통속으로 선거를 치러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박근혜 씨’를 18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51.6퍼센트의 국민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불법·부정선거라는 말이 과하지 않은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에 관한 한 박근혜 대통령은 일단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해야 맞다.

 

다만 방송매체의 적극적 방조하에 국정원이 주축이 되어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국가범죄’의 (결과적인) 수혜자로서의 개인적 부담과 공권력의 범죄행위를 처벌해야 할 통수권자로서의 공적인 책무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 부담은 현직 국정 최고책임자일 경우 그런 범죄에 대해 사과할 의무가 반드시 따른다. 그렇다면 “정치개입의 의혹을 추호도 받는 일이 없도록 공직기강을 엄정하게 세워가겠”다는 약속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 대통령의 공적 책무에 속한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명박근혜 정부가 아니다

 

종교계의 시국선언은 무엇보다 박근혜정부가 그같은 수혜자라는 점을 진솔하게 인정, 사과하고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아니, 앞으로 그런 사과와 책임완수를 기대하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는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가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음에도 국민이 아직 공분(公憤)으로써 탄핵과 하야를 행동으로 옮기는 선까지 가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세간에서는 새누리당의 ‘종북몰이’를 나치 괴벨스의 선무공작(宣撫工作)에 빗대고 제2의 유신시대 운운할 정도로 박근혜정부의 통치방식과 인적 구성도 앞 정부 못지않게 퇴행적이다. 심지어 군국주의의 기미조차 보인다. 이런 시국에 나온 종교계의 시국선언은 시원하게 해갈해준 단비와도 같다. 이 단비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일정부분 기여한 1888~89년의 5공청산과 같은 개혁, 오히려 그보다 더 철저한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고무신과 막걸리가 판친 왕년의 그 고약한 관변 부정선거가 싸이버 정보공간에서 재연된 의혹이 아닌가! 관건은 종교인들의 한뜻을 받아 그런 개혁과 당장의 특검을 대통령과 여권에 강제할 수 있는 실력이 야권에 있느냐다.

 

대통령선거에 국가기관을 동원한 혐의에 걸린 이명박정부의 악덕과 비리에 관한 한 5공 정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으며, 6공화국의 다섯번째 정부인 이(李)정권과의 확실한 단절이야말로 특검의 숨겨진 요체다. 또 한번의 파국적인 유혈비극을 바라지 않는 한 어차피 1972년 10월 유신의 시대로는 못 돌아간다. 어차피 그러한 개혁 없이는 여당도 2014년 6월 예정의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교계에 드리는 말씀

 

개인적으로, 종교계의 시국선언은 빅또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1862)에 등장하는 미리엘 비앵브뉘 주교를 떠올리게 했다. 1830년 7월혁명과 1848년 2월혁명 사이의, 그야말로 혁명이 혁명을 배반하던 시기를 다룬 이 장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가운데 ‘폐족(廢族)’인 미리엘 주교는 ‘혁명’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다. 그러나 그렇게 멀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혁명에 가장 가까워지는 인물로 남아 있다. 주교가 행한 무상(無相)의 증여가 아니었던들 장발장의 회심(回心)과 그에 따른 ‘사랑’의 실천도 궁극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2월혁명에 뛰어든 마리우스를 구출하기까지 개심(改心)에 개심을 거듭하는 장발장의 최후에서 독자가 작품 첫머리에 등장하는 미리엘 주교를 다시 떠올리는 것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그 증여 때문일 것이다.

 

주교의 증여는 어떤 의도나 목적도 있을 수 없는 무상 보시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는 주교 자신의 행위가 아닌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한 주교의 선행에 감화된 범죄자가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한다는 작품 이해가 통속적이라는 것은 그런 뜻에서다.* 길로띤의 끔찍함에 충격받고 돌아와 일기처럼 남긴 미리엘 주교의 한 문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참뜻을 다시 생각해본다. “인간의 법을 더이상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신의 법에만 몰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시국선언에 나선 종교계에, 시국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이, 끝까지 시민과 함께 계셔달라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 싶다.

 

* 작년 연말에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원작의 해당 부분이 모두 생략되었지만 장발장의 실제 회심은 떠돌이 꼬마 굴뚝청소부인 쁘띠 제르베와의 조우에서 이뤄진다.

 

2013.1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