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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말함

손홍규

정치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



손홍규 / 소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에게 수시로 얻어맞았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정당하게 맞은 적은 없는 듯했다. 한번은 어찌나 심하게 귀싸대기를 맞았는지 기절하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어느날인가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로 내게 회초리를 꺾어오라 했다. 양심대로 꺾으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너무 굵으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고 너무 가늘면 두배로 얻어맞을 것 같아서였다. 대체 양심적인 굵기는 어느 정도란 말이냐.

 

회초리를 든 아버지 앞에 바짓가랑이를 걷고 종아리를 내놓은 순간은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정말 당신의 자식이 맞나 싶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더니. 그러던 아버지였는데 내가 중학생이 되던 날 더는 매를 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중학생이면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에게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들에게 맞았다.

 

매질에 담긴 진심과 변명


 

체벌을 가하는 선생님은 두 부류였다. 맞아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경우와 회초리만 들어도 몹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 주로 자신만의 전용 몽둥이를 지녔는데 거기에는 예외없이 ‘사랑의 매’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어른이 된 뒤에는 군대에서 맞았다. 군대에서 맞을 때에는 대부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타를 하고 나면 고참은 빵과 과자 따위를 사준 뒤 다정하게 어깨를 툭툭 치며 내가 너 미워서 때린 게 아니라는 걸 알지,라고 말했다. 그럴수록 나를 미워해서 때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내게 한번도 그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사랑해서 때린다거나 잘되라고 때린다거나 군말을 붙이지 않았다. 때늦은 깨달음이지만 어쩌면 말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진심을 헤아려볼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정치권에서 ‘진정성’이라는 낱말을 애용하는 모양이다. 쓰임새도 일방적이지는 않아서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달라고 할 때도 있고 상대방이 진정성을 지니고 접근해온다면 응하겠다고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진정성을 왜 알아주지 않느냐며 불평하는 동시에 상대방에게는 진정성이 없다며 비난하는 셈인데, 유독 이 말을 애용하는 사람 가운데 한명이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의 고충이 이해가 된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산다는 게.

 

‘아짐찮다’에 깃든 복잡한 마음



나는 말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한 방을 썼다. 저녁을 물릴 즈음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 방으로 마실을 왔다. 먹는 게 시원찮은 시절이었어도 굶을 정도는 아니었건만 손님들은 예의를 차리듯 군입거리를 들고 왔다. 그러면 할머니도 벽장에서 곶감이나 사탕 따위를 꺼내놓았다. 나는 주전부리 그득한 그러한 밤들이 정겨웠다. 거기에서 신화와 전설을 배웠고 낮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이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생생하게 재연되는 걸 목격했다. 하지만 모든 언어를 단박에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귀에 설익은 낱말이 있다 해도 누구 하나 뜻풀이를 해주지 않았기에 정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낱말 가운데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파찰음이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유성음처럼 부드럽게 맴도는 말이 ‘아짐찮다’이다.

 
뜻풀이를 하자면 ‘미안하면서 고맙다’이다. 하나의 낱말에 두가지 감정이 깃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잡한 심사를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해서 아짐찮다는 말은 늘 내게 어떤 머뭇거림을 연상시킨다. ‘아짐찮게 뭘 이런 걸 가져오셨소.’ 미안함과 고마움 가운데 어느 쪽 감정에 무게를 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나의 낱말 위에서조차 서성거렸던 사람들의 진정성은 바로 그 머뭇거림에 존재한다. 

 

진정성이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

 

길 위의 뜨내기를 다룬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은 삶에서 우리가 종종 마주치게 되는 진정성이 하나의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정씨와 영달은 술집에서 도망친 백화를 길에서 만난다. 백화는 그들이 자신을 잡아가려는 게 아닐까 의심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 영달은 그런 백화에게 자신은 ‘의리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백화는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외려 그들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나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에요. 본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아.” 그러나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면 백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던 본명을 백화가 스스로 고백하게 되기까지의 관계를 말하자면 요컨대 그들은 동행이었다.

 

백화는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찾아든 빈집에서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려가며 불을 지피던 영달을 보았고 발목을 삐끗했을 때 스스럼없이 등을 내준 영달을 만났으며 비상금을 몽땅 털어 기차표와 삼립빵 두개 그리고 찐 달걀을 사서 건네주는 영달과 마주쳤다. 백화에게 영달은 매번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동행이란 해가 저물수록 길어지는 그림자처럼 함께 걷는 길이 늘어날수록 서로에게 뜻밖의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경이로움을 동반해야 한다. 영달이 아무리 진심을 담아 ‘의리가 있다’고 말해도 그의 진심은 백화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백화는 그의 진정성을 말이 아닌 행동에서 발견했다. 백화가 백화라는 가명에서 점례라는 본명으로 움직였듯이 영달은 백화와 동행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진정성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진정성이란 단 한순간 언뜻 비치는 신념을 가리키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진심이라는 낱말을 흘릴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그것들을 주워들어 조합한 뒤에야 완성할 수 있는 문장과 같다. 처음에 진심은 주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면 어느새 진심은 서술어가 된다. 명사에서 동사로, 명사에서 형용사로, 명사에서 부사로 끊임없이 존재방식을 바꾼 뒤에야 비로소 진심은 완전해진다. 그러기 위해 영달은 자신의 의리를 동행하는 내내 증명했다. 백화가 본명을 밝히는 순간 두 사람의 진정성 역시 조우했다.

 

고뇌 없는 진정성이란 ‘나쁜 신념’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진정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분명 진심을 담았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는 신념을 지녔을 테고 그 신념을 바탕 으로 진정성을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싸르트르는 이런 신념을 ‘나쁜 신념’이라고 명명했다. 미안하다와 고맙다 사이에서 머뭇거릴 줄 아는 사람들의 고뇌를 알지 못한다면 진정성이 한번에 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충분히 미안해하고 충분히 고마워할 수 있을 때 ‘아짐찮다’라는 낱말에서 굳이 한가지 감정만을 분리해내는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듯이.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가 내게 매질을 하던 시절을 돌아보면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흠구덕을 들추며 피멍이 든 내 종아리에 그 누런 바셀린 연고를 발라줄 때 아버지가 어떻게 꾸욱 눈을 감고 잠든 체했는지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학생이 된 뒤로 아버지 눈에 내가 성이 찼을 리 없으나 아버지는 용케도 잘 참았다. 그러니 이제는 좀 아버지에게 맞고 싶다. 당신은 오랜 세월 진정을 보여주었으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과연 이명박 식의 진정성을 회고할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까. 그가 정말로 자신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그는 나쁜 신념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의 진정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2011.7.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