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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감정 없는 삶?

황정아
황정아

황정아

인공지능의 현실화를 내다보는 이 시대에 기계가 얼마나 인간을 꿈꾸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인간은 자주 기계가 되기를 꿈꾼다. 어느 페미니스트는 진작 ‘사이보그 선언’을 내걸었거니와 각종 슈퍼히어로물도 실은 기계를 향한 인간의 꿈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 꿈은 신체역량의 확대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내게 분노만 없다면 분노를 일으키는 눈앞의 이 자를 더 멋지게 응징할 수 있을 텐데, 슬프지만 않다면 나를 슬프게 하는 이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텐데, 감정만 없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감정노동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순간엔 인간의 감정을 동경하는 영화 속의 몇몇 AI들의 회한(처럼 보이는 것)이란 실로 가소로울 따름이다.

 

감정 없는 인물들이 전하는 카타르시스

 

올 초에 출간된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창비 2017)에는 아몬드처럼 생긴 뇌 편도체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소년 선윤재가 등장한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학습’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을 길러준 엄마와 할머니가 ‘묻지 마 폭력’에 희생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어떤 감정을 갖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왜’라는 질문들을 붙잡고 살아간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가 등등. 그렇게 도달한 ‘이해’의 힘으로 소년은 모두가 포기해버린 친구를 끝까지 돕는다. 물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에 친구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폭력을 견딜 수도 있다. 윤재에 따르면 사태는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245면) 감정이 없기 때문에 ‘진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역설이 이 이야기의 뼈대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 황시목 검사도 비슷한 인물이다.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감정을 느끼는 법, 더 정확히는 감정을 의식하는 법을 모르게 된 그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출세의 기쁨이나 협박의 공포에 한치 흔들림 없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다. 하다못해 그가 검사장과 검찰총장, 재벌회장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허튼 소리에 일말의 동요 없이 또박또박 대꾸할 때, 그러니까 감정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로서는 격한 감정적 자원을 동원하지 않고는 도무지 하기 힘든 일을 지극히 차분하게 함으로써 상대에게 반격의 틈을 주지 않을 때, 보는 이로서는 밀려드는 카타르시스의 ‘감정’에 젖게 된다.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옳은 소리를 하려다보니 감정적이 되고 그 때문에 ‘태도가 문제’라며 도리어 책을 잡히는, 그런 사소한 위험 따위 그에게는 없다.

 

이런 카타르시스에 비추어볼 때 마지막에 선윤재가 흘리는 눈물이나 황시목이 보여준 미소는 도리어 불만스럽다. 울지도 웃지도 않으며 이들이 거둔 압도적 성취 앞에 한갓 눈물과 미소가 대수란 말인가. 선윤재와 황시목에게는 각각 진정성과 정의감이라는 덕목이 교과서적으로 탑재된 듯 보인다. 그런 미덕 덕분에 이들은 감정 없음의 또다른 부류로 설정되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와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마치 로봇의 3원칙처럼 미덕이라는 항목을 변경 불가능한 초기설정으로 세팅하는 것. 이 역시 기계를 향한 꿈의 변종이다. 사실 선윤재와 황시목에게는 ‘감정교육’을 담당해준 조력자가 있고 그들은 남달리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굳건한 인물들이다(윤재에게는 엄마, 황시목에게는 형사 한여진. 공교롭게 둘 다 여성이다). 이런 조력자들이 주인공이 아닌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매력을 주기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감정 없는 삶을 상상하는 이유

 

영화 「엘르」(폴 버호벤 감독)의 주인공 미셸에 관해서라면 좀더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이는 역시 미셸이 ‘그’가 아닌 ‘그녀’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여기서는 그녀의 감정 없음에만 주목해보자. 침입과 강간으로 이루어진 충격적인 첫 장면은 미셸이 다친 몸으로 깨어진 그릇을 쓸어담고 찢어진 옷을 버린 다음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흰 거품을 물들이며 번지는 자신의 피를 흔들어 목욕물과 섞어버리는 몸짓으로 이어진다. 폭력이 준 신체적 고통 이외의 다른 어떤 감정적 동요의 기미는 눈물 한 방울, 탄식 하나로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는 이런 일이 있고 그 일이 내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후 부르주아 여성주체의 한 완성형이라는 문구가 절로 떠오를 만큼 미셸이 돈과 지위를 얻었고 또 이용하는 인물임이 드러나지만, 그 점이 그녀를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여기까지는 오히려 의아할 것도 없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녀가 주는 가장 큰 낯섦은 폭력 앞에서, 그리고 폭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회적’ 금기 앞에서, 도무지 두려움이 없는 점이다. 과거의 어떤 이유로 경찰을 불신하는 그녀는 모든 문제를 자기 손으로 처리하는 길을 택하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만일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강간 ‘피해자’로서 그녀가 어떤 사회적 시선을 겪어야 했을지 역으로 환기시킨다. 이를테면 재판 과정에서 강간범인 이웃집 유부남에게 그녀가 매력을 느끼고 접근했던 적이 있음이 드러난다면? 더구나 강간범임을 알게 된 다음에도 그와 어떤 관계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강간은 강간이고 따라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건 바로 그녀 자신이 심판하는 주체였기 때문에 지켜진 원칙이며, 이 심판을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그녀가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참고로, 사이코패스적 살인행각을 벌인 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감정 없음을 설명하는 한 단서로 주어져 있고 그 점은 영화에 담긴 여러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감정 없음의 ‘장점’을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차라리 감정 없는 삶이 아니고는 견디기 힘든 세계임을 나타내는 증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정이 문제가 되는 순간에는 늘 폭력이 있다. 하지만 폭력이 야기하는 고통과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는 편이 폭력에 더 잘 대응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불행히도 폭력 이후에나 떠오른다는 점에서 늘 뒤늦은 방책이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나마, 한번쯤은 끝까지 이겨내고 또 이겨보고 싶은 심정이 이 이야기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7.8.9.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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