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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보엠 『숲속의 평등』

김종엽

인간이라는 정치적 수수께끼
―크리스토퍼 보엠 『숲속의 평등: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토러스북 2017

 

 

rtjrj2휴일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보여주는 고래, 사자, 코끼리, 벌, 도마뱀, 혹은 희귀 조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아무 생각 없이 한참 보게 될 때가 있다. 왜 이런 다큐멘터리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쉽게 잡아채는 것일까?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 뒤에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악어나 기린 따위는 차이를 통해서 인간의 자기인식을 북돋우며, 침팬지나 보노보는 인간의 진화론적 유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계통발생적으로 거리가 멀더라도 개미나 벌에 대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은 거대한 규모의 분업과 군집 생활의 면에서 인간과의 비교를 유도할 수 있다.

 

확실히 그런 때문인지, 제인 구달(Jane Goodall)이나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경우에서 보듯이, 침팬지와 개미에 대한 연구가 인간 본성에 대해 발언권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침팬지나 개미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연구는 아니다. 인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직접 연구해야 하며, 침팬지나 개미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해명에 의미있기 위해서는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인간과 관련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인간의 정치적 다원성

 

이런 점에 비춰볼 때, 크리스토퍼 보엠(Christopher Boehm)의 저술 『숲속의 평등』(김성동 옮김)은 꽤 의미있는 저술이다. 그는 인간의 여러 본성 가운데 정치적인 면을 탐색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연구작업의 본령인 인류학을 중심에 두고 영장류 연구와 진화생물학을 모두 검토한다. 그럼으로써 이런 연구들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접맥되는지 따지고 살핀다.

 

물론 보통의 사회과학자는 보엠 같은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 같은 것에 답하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할 법한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보엠의 시도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논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그리 되는 이유는 그런 논변을 전개할 만큼 대담한(대개는 무모한) 이들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에서든 학문적 작업에서든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저런 배후가정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정면에서 작심하고 다뤄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다루는 일은 도구나 언어 사용과 관련해 인간 본성을 규명하는 것보다 까다롭다. 인간사회가 대단히 평등한 사회에서부터 극도로 전제적(專制的)이고 위계적인 사회까지 다양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엄청난 융통성을 말해주는 이런 다원성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다뤄보려는 의욕을 꺾는다. 하지만 보엠은 이런 문화적 다양성을 진화론적으로 재배열함으로써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해명할 경로를 개척해보고자 한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진화의 기원점으로 현재 영장류와 인간의 공통 조상을 가정하고 그 특징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인간이 여타 영장류와 어떤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갔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평등 vs. 위계

 

보노보는 좀 덜하지만 침팬지와 고릴라의 경우 현저하고, 인간도 상당 정도 그러한 영장류의 핵심 정치적 특징은 알파 수컷을 정점으로 위계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영장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시점에서 인류의 정치적 본성은 위계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화경로를 개척했던 구석기시대에 인류는 어떤 정치적 본성을 발전시켰을까? 진화의 다음 고리를 채우기 위해서 보엠은 19세기와 20세기에 인류학자들이 연구했던 수렵채취사회를, 마찬가지로 수렵채취생활을 했던 구석기 인류의 자리로 옮겨놓는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수렵채취사회는 대단히 강력한 평등주의 에토스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력이 정통화되고 강화되고 세습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다양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웃 무리와의 싸움에서 거둔 무훈 또는 완력이나 지략의 뛰어남을 내세우는 거만함(권력축적의 원천)이나 인색함(자본축적의 토대)을 보이는 ‘급부상자’(upstart)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고 추방하고 때로는 살해해버릴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런 수렵채취사회의 특성을 진화의 다음 고리에 끼워넣으면, 인간사회의 진화경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위계적인 본성을 가지고 출발한 인간이 구석기 기간 동안 평등주의적 에토스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고, 이어지는 신석기 이후에는 왕국이나 제국이 보여주듯이 극히 위계적인 사회로 나아갔다가, 근대사회 이래로는 다시 한결 평등주의적 에토스가 되살아난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하기도 한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정치적 다원성은 보엠이 그려낸 진화적 경로 안에서 지그재그 형태로 재현되는 듯하다. 하지만 진화론의 도입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정치적 다원성을 본성의 변형 과정으로 다뤄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선 풀어야 할 문제는 수렵채취에 기초한 구석기 인류 생활사의 어떤 점이 영장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위계적 본성을 그 반대 방향으로 구부릴 수 있게 했는가이다. 그 과정에는 환경이 매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갈라져 자신의 경로를 개척했던 때는 플라이스트세(Pleistocene) 후기, 대략 지금으로부터 12만 5천년 전부터 1만년 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빙하기 말기로서 기후변화가 심하고 인류가 영양공급을 위해 거대 초식동물의 사냥을 중시해야 했던 시기이다. 이런 생활사적 조건은 높은 이동성을 요구했고, 성인 남성 모두를 사냥꾼으로 만들었다. 이동을 위한 집합적 의사결정, 다른 무리와의 빈번한 조우와 전투적 갈등, 사냥과 전투를 위한 협동, 무기 사용으로 인한 남성들 사이의 육체적 격차의 의미 축소 등 모든 요인들이 평등주의를 향한 압력을 강화하며, ‘먹거리군’(foragers) 무리들 간의 경쟁 상황에서 평등주의적 에토스는 (자연선택의 하나로서) 집단선택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적 압력이 평등주의 에토스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본래 가지고 있던 위계적인 본성과 그것이 접맥되어야 한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 보엠은 지배하려는 성향 자체가 사실은 복잡하게 분기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한다. 지배하려는 동기는 지배받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지배의지의 이면은 지배받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지배에 대한 복종 또한 두려움으로 인한 굴복일 뿐 아니라 정교하게 계산된 이익추구인 면도 있다. 그러므로 하위자들의 연합이 어렵지 않고, 그들이 형성한 연합의 힘이 급부상자 또는 알파 수컷을 억누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며, 그런 전략이 성공한 집단이 집단선택을 통해서 생존할 가능성이 커진 조건이라면, 하위자 연합이 고무되고 이로부터 평등주의 에토스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보엠은 인간의 평등주의는 위계의 파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위자 연합이 급부상자의 출현과 권력 강화를 신중하고 면밀하게 감시하고 견제하는 지속적 작업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라고 본다. 평등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종류의 위계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역전된 지배위계’(reverse dominance hierarchy)라고 명명하며, 그것이 이 책의 원제가 (원제와 달리 정한 역자의 고민이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숲속의 평등’이 아니라 ‘숲속의 위계’(Hierarchy in the Forest)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한 평등주의적 행동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인간의 정치적 본성으로 정착된 것일까? 이 점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긴 어렵다. 저자는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을 인용하며 인간 본성의 변화를 초래할 만한 자연선택 과정으로 2000세대를 거론한다. 인간의 경우 2000세대는 대략 5만년 정도이며, 이런 정도의 기간은 구석기 말기 동안의 인간 진화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경유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선상에서 신석기혁명 이후 1만년의 기간은 정치적 본성의 변화를 유발하기에는 모자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인간사회의 양상은 인간의 위계적 본성이 수렵채취사회를 경유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보엠은 수백만년 동안 영장류 진화 과정에서 물려받은 인간의 위계적 본성이 10만년 동안의 수렵채취사회 속에서 정착된 평등주의적 본성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양면 두가지 본성 모두가 인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결론 내린다.

 

인간, 최대의 수수께끼

 

인간의 정치적 본성의 진화에 대한 보엠의 재구성은 하나의 스토리로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험적 사태와도 상당 정도 조응한다. 그리고 평등주의가 역전된 지배위계라는 해석도 인간의 정치적 행태를 분석할 때 고려해볼 만한 입론이다. 하지만 책 전체의 논의를 살피면서는 두가지 점이 불만스럽게 다가왔다.

 

하나는 보엠이 상당 분량을 할애하며 중요하게 다뤘지만, 평자가 소개하지 않은 부분인 진화생물학과 인간의 정치적 본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입장은 새로운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계속해서 변해왔다. 보엠은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과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David Sloan Wilson)이 대립선상에 있던 시기에 후자의 편에 서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지금 에드워드와 데이비드는 입장을 함께한다[전자의 2013년작 『지구의 정복자』(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3)를 보라]. 이렇듯 진화생물학 자체가 빠른 속도로 진화 중이라서 이 분야와 인간의 정치적 본성 문제 사이에 정확한 접점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집단선택 그리고 이타주의의 진화를 정치적 본성의 문제와 연결해서 다룰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진화생물학이 이타주의 형성의 방해요인으로 중시하는 집단 내 무임승차자는 정치적 지배의 위험을 내포한 지도자 내지 급부상자와 불량배를 모두 뒤섞는 범주여서 그 범주를 그대로 인간사회의 정치적 수준으로 옮겨오면 논의 전체가 불명료해진다. 불량배는 무임승차자지만, 모든 지도자/급부상자가 불량배는 아니며, 불량배가 지도자/급부상자가 아닌 경우도 매우 많다.

 

다른 하나는 보엠이 인류학과 영장류 연구와 진화생물학을 비교하고 결합하느라 소홀히 하고 있는, 전통적으로 역사학이 다뤄온 엄청나게 위계적인 성격을 가진 왕국과 제국들의 문제다. 사실 침팬지 사회에서 발견되는 위계적 사회에 대응하는 인간사회 형태는 추장제 정도다. 알파 수컷 침팬지는 왕이나 황제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어떤 영장류도 가본 적 없는 극단적 위계의 사회로까지 나아갔던 동물이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다루겠다는 목표, 그리고 본성은 진화적으로 안정화된 것이라는 전제 때문에 신석기 이후 양상들은 충분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신석기 이후 경험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이 (보엠이 생각하듯이) 복수의 본성의 양가적 현존이라는 관점에서뿐 아니라 본성 안의 가능성을 대규모로 강력하게 전개하는 증폭성의 관점에서도 조명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연구는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과 같다. 그런 점에서 그런 작업에 나선 이는 모두 오이디푸스를 닮은 점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의 답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이 수수께끼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처럼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다. 보엠의 책을 읽는 경험이 내내 절뚝거리며 걷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7.7.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