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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치의 동력과 파괴력

한기욱

 

한기욱

한기욱

힐러리의 패인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일단 일어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미국 대통령선거 후 한달이 지난 지금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에게 승리한 것이 이제는 그리 이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성희롱급 여성비하 발언과 인종차별적 막말로 가득한 ‘어록’에서 실감하듯, 트럼프는 대통령 자격은 고사하고 공인의 품격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교양있는 언어의 힐러리가 망나니 같은 트럼프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표상하는 엘리트 기득권층에 대한 미국인들의 잠재적 분노가 그만큼 광범위하고 컸기 때문이다.

 

막판에 힐러리는 “Love trumps hate”(사랑이 증오를 이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맹렬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고유명사 ‘트럼프’를 동사로 활용하여 그를 공격함으로써 승리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구호를 외칠수록 ‘트럼프’를 불러내는 역효과가 있는데다가 소리만 들으면 ‘Love Trump’s hate’(트럼프의 증오를 사랑해)로도 새겨진다. 게다가 이 구호가 전제하는 사랑=힐러리, 증오=트럼프의 공식은 얼마나 타당할까? 무슬림, 유색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가 ‘증오’를 대변하는 것은 일리있지만 힐러리가 ‘사랑’을 대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을 대변한다기보다 ‘증오’와 ‘분노’가 들끓는 (기득권 바깥의) 현실을 외면한 게 아닐까. 힐러리는 지금이 ‘분노의 시대’라는 것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분노의 시대

 

사실 기성체제에 대한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빼놓고서는 힐러리의 패배를 설명할 길이 없다. 한때 철강, 석탄, 자동차 등 미국 제조업의 아성이었지만 공장이전의 여파로 폐허가 된 지역―‘러스트벨트’(Rust Belt)라 불리는 미시건·위스컨신·펜실베이니아 등의 중서부 공업지대―에서의 토박이 백인들의 전망 없는 삶은 필립 마이어(Philip Meyer)의 장편소설 『아메리칸 러스트』(American Rust, 2009; 한국어판 올 2010)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펜실베이니아를 배경으로 “미국의 꿈의 추한 뒷면”을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한 인물은 “우리는 하나의 국가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선거전 막판에 빌의 강력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는―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이라서 안심해도 된다는 이유로―‘러스트벨트’를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더 징후적인 것은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과 이민자들에 대한 추방위협에도 불구하고 히스패닉과 흑인들이 기대만큼 힐러리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힐러리는 선거전 막판에 히스패닉과 흑인 비중이 높은 플로리다 주를 집중 공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이긴 남편과는 달리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트럼프의 ‘백인민족주의’(white nationalism)가 백인들을 결집시키는 것만큼 히스패닉과 흑인을 끌어당기지 못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인종이든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은 힐러리를 택하는 데 주저했다는 뜻이다. 미국의 정치지형으로 보면 부의 양극화 혹은 계급적 갈등이 인종적·종족적 분할을 가로지르는 형국이다. 트럼프 정치는 요란한 백인우월주의에서 보듯 주로 인종적·종족적 분할선을 타고 움직이지만 그 기본동력은 부의 양극화로 말미암아 점점 거세지는,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분노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트럼프가 힐러리보다 나은 대통령이 될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미국인들 다수가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그가 떠벌리는 공약을 순전하게 다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기대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본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보호무역주의 기치 하에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대대적인 인프라 재건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소위 ‘트럼프노믹스’는 2007-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안정된 일자리와 주거지를 박탈당했거나 박탈당할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대중에게 솔깃하게 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월가와 워싱턴 정가 간의 썩어빠진 기득권체제를 개혁하겠다는 호언 역시 실현 여부를 떠나 일단 듣기에 좋다.

 

미국의 노동자 대중이 트럼프를 선택한 주된 동인은 근본적인 변화에의 갈망이다. 어떤 희망도 없이 점점 나빠지는 삶을 바꿔보려는 욕구가 차올라 파국을 감수할 만큼 필사적이다. 최근 국내에도 개봉한 맥킨지(David MacKenzie) 감독의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Hell or High Water, 2016)는 이런 절박성을 실감케 한다. 영화는 금융위기로 피폐해진 텍사스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작은 농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형제가 은행털이로 나서는 전말을 건조하게 다룬다. 퇴직을 앞둔 노련한 형사가 낌새를 채고 찾아와 동생에게 묻는다. 당신 형이라면 은행털이에 나서는 것이 이해되지만 모범적인 당신이 왜 그랬느냐고. 동생은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서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전부 감염됐어요. 하지만 내 아이들은 안 돼요”라고 답한다. 텍사스의 누런 먼지 날리는 풍경이 벼랑 끝 인물들의 메마른 내면인양 황량하게 느껴진다.

 

미국인들 다수는 힐러리에게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사실 힐러리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월가-워싱턴 정가의 기득권체제가 바뀔 때만이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트럼프는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지도자로 선택된 것이라기보다 기성체제의 판을 뒤흔들거나 깨는 파괴자의 역할로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닐까. 물론 망나니 같은 트럼프의 기용은 한시적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기회비용과 위험을 동반하는 실험이다. 트럼프가 불러일으키는 변화의 바람이 너무 약하면 사회적 분란과 갈등만 조장할 뿐 결국 기성체제에 흡수되어버릴 것이고 너무 지나치면 재앙적 파국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치의 후과

 

트럼프 정치의 돌풍이 어떤 후과를 낳을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의 정책과 인사는 공약만큼 파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약에서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공화당 주류와 맥이 닿는 라인스 프리버스를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대안 우파’ 출신의 극우주의자 스티브 배넌을 수석전략가로 삼음으로써 일단 실용주의와 이데올로기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렇지만 월가와의 관계를 청산할 것처럼 호언장담하더니 당선되자마자 재무장관과 상무장관에 월가 사람을 내정했다. 법인세 인하를 비롯한 감세 정책은 양극화를 더 심화시킬 것이고 ‘오바마케어’로 일컬어지는 의료보험제도를 폐기한다면 민생복지는 더 악화될 것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부터의 탈퇴가 미국과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도 미지수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지도 주목할 대목이며, 기후변화에 대한 태도 역시 중차대한 파급력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트럼프 정치가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브렉시트(Brexit)와 이어지는 보호무역주의 혹은 자국우선주의 경향을 가속화할 가능성이다.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승리에 이어 12월 4일 이딸리아 국민투표가 부결됨으로써 유럽연합의 버팀목 중 하나였던 젊은 수상 렌찌(Matteo Renzi)가 물러나게 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이다. 개헌안 부결 운동에 나선 대중주의적 ‘오성운동’(五星運動, Movimento 5 Stelle)과 반이민적 ‘북부동맹’(Lega Nord)이 트럼프와의 연대를 과시하면서 이딸리아의 유럽연합 탈퇴―‘이딸리브’(Italeave)―움직임을 본격화할 태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극우 인민전선(Front National)의 르뻰(Marine Le Pen)이 공화당 후보와 함께 크게 득세한 반면 좌파 후보는 결선 탈락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도 맥이 통한다. 트럼프의 부상은 시대적 현상인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인 미국과 유럽에서 반세계화, 반이민, 국수주의적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트럼프의 정치가 기성체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는커녕 깊이 골병들게 만들 공산이 크다. 세계체제 패권국가로서의 역할을 접는 대신 외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외국과 군사협정을 유지하는 비용을 받아내려는 트럼프의 실용주의 대외노선은 외국간섭을 자제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기후변화협정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처럼 세계적인 체제관리의 책임을 내팽개치는 면도 있다. 그만큼 세계는 위험해지고 취약해지겠지만 트럼프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이되 돈 외의 가치에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이명박이나―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이 지적했듯이―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소설에 등장하는 플렘 스놉스(Flem Snopes) 같은 인물을 연상시킨다. 그러니 그의 정치가 인간적인 존엄과 품격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트럼프 정치를 감내하면서 어떻게 새 세상을 만들어나갈지의 과제가 이제 미국민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 현실과 직결되는 그의 대외정책에 창의적으로 대응할 정부를 세우는 것이 촛불시민들의 임무이듯이.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2016.1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