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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담론은 통일담론과 소통해야 한다

김연철

김연철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정치외교학

한반도는 전환기다. 남북관계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쌓아온 교류협력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뢰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북핵문제는 일년 전 9·19공동선언의 성과가 사라지고 기약 없는 교착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어떤가? 세계적 차원에서 군사전략을 전환하려는 미국의 필요에서 비롯된 전략적 유연성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은 국내적으로 격렬한 이념논쟁을 촉발시켰다. 보수진영은 자신들이 이미 1990년대초 노태우정부 당시 작통권 환수를 추진한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보수 이념의 기초인 ‘국익’조차도 부정되는 현재의 담론상황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한편 진보진영에서는 ‘통일담론’과 ‘평화담론’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전환기적인 상황에서 이 논쟁은 새로운 미래담론을 정립할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통일과 평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6·15담론’은 통일과정에서 실현가능한 평화의 문제를 핵심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평화개념’이 부재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근대(안보)국가의 해체라는 이상주의 이전에, 남북 양체제(북의 선군정치와 남의 냉전반공주의)의 민주주의적 진화와 남북관계에서의 냉전 해체를 위한 현실적 과제다.

6·15담론은 과거의 통일지상주의론과 다르다. 6·15담론은 6·15공동선언의 제2항을 주목한다. 남과 북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백낙청 교수는 “통일을 하기는 하되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를 미리 못 박지 않고 지금 가능한 통일작업부터 진행한다는 것”으로 정리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통일 1단계인 남북연합 단계의 진입조건으로 6자회담의 성공과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을 들고 있다. 대체로 평화정착을 토대로 통일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점과 통합을 단계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6·15담론의 핵심이다.

남북한이 점진적으로 통합해야 하는 이유는 양자간의 정치적 불신, 군사적 대립, 경제적 격차, 문화적 이질성의 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교류협력의 확대를 통해 정치적 신뢰를 점진적으로 구축하고 군사적 긴장완화를 추구하며 경제적 격차를 줄여가면서 문화적 동질성을 찾는 ‘사실상의 통일’의 실현이 현실적인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신)기능주의적 접근이 자연스럽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류협력의 누적과정이 지니는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많은 접촉이 있었다. 그 접촉을 통한 변화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문제해결이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문익환 목사의 “통일은 됐어”라는 말은 통일의 완결이라는 의미보다는 통일의 시작이 가능해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6·15담론은 통일과정의 역동성을 강조하기에 충분히 평화담론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평화와 통일 담론의 논의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또다른 이분법이 있다. 국제공조와 민족공조의 대립이라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이념적 이분법이 그것이다. 일례로 핵문제 같은 사안은 남북관계 수준에서 해결되기 어렵다. 북미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짐에 따라 남북간 협력범위가 위축되는 까닭은 경협을 비롯한 많은 남북관계의 쟁점들이 국제화되어 있고, 포괄적인 환경변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요한 사안들은 남-북-미 삼각관계의 복합구도에 의해 결정된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의 우선순위를 가릴 수야 있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관계가 선순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이라는 미래담론이 구체적인 설득력을 가지려면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적인 군사전략이 재편되면서, 한미양국은 한미동맹의 비전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재편과정은 평화와 통일 담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사실 작통권 환수문제는 두 개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주국방’으로, 전통적 안보국가 담론인 ‘힘에 의한 평화’의 개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평화논의의 주도권’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기본적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개념을 포함한다. 이 두 개의 상충적인 개념은 현상황에서 중첩되지만, 현실적 억지와 미래지향적 평화는 정치적 역관계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 것이다.

전통적으로 북한은 군사문제를 논의하는 장에서 남한을 협상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작통권 환수는 남북관계에서 서해 평화정착 방안을 비롯한 군사적 쟁점을 좀더 실질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서 남북 당사자간 대화의 비중을 높일 기회다. 그러나 현재의 논쟁에서는 ‘평화담론’이 부재한 탓에 ‘군비증강 담론’만 부각되는 형편이다. 자주국방을 위해 2020년까지 약 621조원의 국방비를 투자해야 하는 계획은 현재의 대북 억지상황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6자회담의 진행에 따라, 혹은 이 과정에서 별도의 ‘4자회담’으로 이루어질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가시적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국방비 규모는 수정될 수 있다. 현재의 대북 억지상황을 고려한 국방계획과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된 상황에서의 새로운 ‘국방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분단체제의 핵심 장벽을 허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평화가 통일을 저절로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평화공존의 상황에서도 통일을 지향하는 신뢰와 상호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분단으로 가는 길이고 분단은 다시금 평화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평화담론이 중요성만큼이나 통일담론이 맡아야 할 현실적 역할이 있다. 평화와 통일 개념의 분단이 아니라, 공존과 통합을 기대한다.

2006.09.05 ⓒ 김연철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