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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과 문학권력 논란을 겪으며

백영서

*이 글은 최근 발행된 『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백영서

백영서

이번호를 내보내는 편집진의 마음가짐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습니다. 지난 6월 신경숙 작가의 표절 시비를 겪은 뒤 안팎의 많은 분들이 가을호를 주시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먼저 편집주간으로서 이 기회를 빌려 본지를 아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저는 연구년을 맞아 해외 대학에서 강의 중이었습니다. 문학출판부 명의의 최초 보도자료가 내부 논의 없이 나감으로써 독자의 분노와 논란을 키운 것이 이런 제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송구스러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창비의 경우 편집인을 포함한 편집위원들은 계간지 편집을 담당하고 저만이 계간지와 단행본 출판업무를 함께 관장하는 시스템이기에 더욱 곤혹스러웠습니다.

 

저는 그 일 이후 저희에게 쏟아진 사회적 관심과 반응에 놀라면서도 거기에는 창비가 지난 50년간 걸어온 길에 대한 신뢰와 기대도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더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깊은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저희는 그간 내부토론을 거치면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인 차용이나 도용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표절이라는 점이라도 신속하게 시인하고 문학에서의 ‘표절’이 과연 무엇인가를 두고 토론을 제의하는 수순을 밟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작가가 ‘의식적인 도둑질’을 했고 출판사는 돈 때문에 그런 도둑질을 비호한다고 단죄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판에서 창비가 어떤 언명을 하든 결국은 한 작가를 매도하는 분위기에 합류하거나 ‘상업주의로 타락한 문학권력’이란 비난을 키우는 딜레마를 피할 길이 없었기에 저희는 그동안 묵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고, 독자 여러분이 비판을 하시더라도 창비의 기본입장을 다소간 이해하며 비판해주시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봅니다.

 

표절 문제에 대한 발언이 특히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또다른 쟁점, 곧 문학권력(내지 문화권력) 논란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비가 ‘문학권력’으로 지목되는 순간 감정이나 도덕 차원의 비난 대상에 오르고 무슨 발언을 해도 불순한 권력행사로 비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 또한 찬찬히 따져볼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문학권력이란 것이 문학장 안에서 일정한 자원과 권위를 가진 출판기업을 가리키고 그 출판사가 유수한 잡지를 생산하는 하부구조로 기능함을 의미한다면, 창비를 문학권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간호 권두논문에서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한 창비에 공공적 가치의 실현은 창사 이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지속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적 기반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공공성과 사업성의 결합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왔습니다. 창비가 그간 거둔 사업적 성과 또한 저희의 공공적 기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창비가 그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균형을 언제나 잘 유지해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창비의 주간을 맡은 것은 창비가 창간 40주년을 맞았던 10년 전입니다. 당시는 노무현정부가 후반기에 들어서며 ‘진보의 위기’가 거론되고 신자유주의 시장논리가 점점 강화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창비 혁신의 기본방향을 ‘운동성 회복’으로 잡았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볼 때 당시의 약속에 비춰 성과의 미흡함을 실감합니다만, 창비의 편집진이 그 목표를 저버린 적은 없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그럴수록 저희는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비판에 귀기울이며 자세를 더욱 가다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권력, 나아가 출판권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언론권력이나 종교권력 등을 포함하는 문화권력의 실태와 그 구체적 작동양상을 분석하는 작업도 당연히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호에는 우선 최근 사태를 둘러싼 외부의 다양한 견해를 경청하고 앞으로 더욱 심화된 토론의 자료로 삼기 위해 다른 자리에서 발표된 세분의 글을 ‘긴급기획’란에 게재합니다. 하나는 문화연대와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토론문이며, 또 하나는 문화연대와 인문학협동조합 주최의 토론회에서 나온 글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이 기획은 물론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저희는 문학에서의 모방과 표절, 문화권력 문제 등 이번에 크게 부각된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함은 물론, 창비가 수십년간 공들여온 ‘창비담론’을 더욱 내실화하여 훌륭한 문학을 생산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한층 적극적으로 수행하고자 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소중한 자원을 겸허하게 활용하면서 한국 문학과 문화의 창조력을 높이고 공공성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운동을 벌이는 분들과 연대 및 선의의 경쟁을 한껏 도모할 생각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애정과 편달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백영서 / 창비 편집주간,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15.8.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