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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종북 프레임

황정아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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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의 남북정상회담 제안과 그에 대한 박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에 이르기까지 새해 들어 남북관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조짐이 있다. 일개 국민으로서는 남북대화와 교류의 노력이 왜 어느 때는 깡그리 묵살되고 또 어느 때는 새삼스레 당위로 강조되는지 좀처럼 알기 어렵다. 난데없기로 치면 이 정부 들어서 이미 ‘통일대박’이라는 구호가 생생한데, 그 구호가 어떤 변화를 낳았는가를 보면 이번의 조짐이 어디에 이르게 될지 솔직히 큰 기대는 생기지 않는다.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의제가 예측 불가능한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데 비해, 오늘날 우리가 분단의 상황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층 일관되게 알려주는 지표는 통진당 해산에서 또 한번 위력이 발휘된 이른바 ‘종북’의 프레임이다. 그 용어적 계보를 더듬어보면 반공, 빨갱이, 간첩 같은 유사어가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반공’이나 ‘빨갱이’라는 딱지는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효력이 급감했고 ‘간첩’ 역시 무리한 조작을 남발한 나머지 다분히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북’의 작동방식

 

이런 유사어들을 불현듯 대체하며 등장한 ‘종북’의 존재감은 범세계적 공산주의 세력에도, 실재하는 대남공작에도 기대지 않는다. 지향하는 이념 내용과 사실상 무관하고 구체적인 활동의 목적과 결과에서도 자유로운 이 ‘종북’의 단순하고도 막연한 지시범위는 ‘북한과의 연계성’이며 이 연계는 마음만 (잘못) 먹으면 얼마든지 걸어 붙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한탄하듯 단순한 시대착오적 퇴행이기보다 역사적 변화를 꽤 충실히 반영한 고안물인 셈이다.

 

만들어진 경위가 어떠하든 ‘종북’이라는 용어가 남발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 그것이 갖는 효용이 매우 크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이 그물에 걸리는 순간 해당 대상은 북한이 얼마나 열등한 사회인지 열렬히 비방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게 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지 않음을 서둘러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이런 입증을 가장 철저히 수행하는 방식은 북한이 이미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 존재라는 사실, 남북한이 분단체제 아래 어쩔 도리 없이 함께 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너 자신과 북한의 무관함을 증명해보라는 명령에는 너의 현실과 북한의 연관을 부인하라는 암시가 걸려 있다. 이렇게 해서 ‘종북’은 비판적 인식 일반에 대한 억압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분단현실에 대한 인식의 억압을 겨냥한다.

 

종북 프레임, 언제까지 갈 것인가?

 

종북 프레임이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통일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와 실천은 그런 일상에서 자유로운 어떤 초월적 주권자의 예외적 결단 혹은 시혜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정작 (혹은 고작) 헌법적 주권자인 국민에게 남북 관련 이슈들은 대체로 난데없다고 느껴진다. ‘도둑처럼 오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통일 논의이고 그렇게 온 것은 마찬가지로 ‘도둑처럼’ 사라지기가 십상이다. 그럴망정 이따금씩 꺼낼 수 있는 이 ‘초월적’ 통일 카드는 종북 프레임에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해준다. 그러니까 통일을 영 안하겠다는 건 아니고 일개 국민인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터무니없이 편리한 억압기제로서의 종북 프레임이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자체가 남한사회의 일상에서 분단이 가장 가시적으로 발현되는 양식이면서 동시에 분단체제의 인식과 극복을 봉쇄하는 역할을 노린다는 데는 일종의 역설이 내포되어 있다. 억압의 도구로 힘을 발휘할수록 그것은 더 분명하게 억압의 실체를 드러낼 도리밖에 없다. 최소한의 이데올로기적 ‘위엄’도, 그렇다고 최소한의 사실적 ‘근거’도 갖추지 못한, 흡사 허깨비 같은 이 프레임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의 위력은 투명하리만큼 직설적으로 분단체제의 구속력을 지시하고 있다.

 

천안함에서 통진당 해산까지, 그리고 심지어 세월호에 이르도록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우리 사회의 온갖 이슈에 달라붙는 종북 프레임은 스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종북적’이라는 점에서 조롱과 패러디의 소재이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종북’의 허깨비를 쫓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깨비임을 폭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것은 우스꽝스럽고 비뚤어진 그 형상이 우리의 현실인식에서 너무 자주 외면되어온 실체의 징후임을 직시하는 일이다. 분단현실이 ‘종북적’인 한, 우리 모두는 실제로 ‘종북적’인 것이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5.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