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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주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박여선

‘글로벌’했던 18세기 조선의 학자들
―한정주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다산초당 2016

 

 

kytkyt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18세기는 대단히 매력적인 시대다. 전공을 불문, 개별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차치하고 이 시대 자체가 지닌 문화적 매력이 말할 수 없이 다채롭고 풍요롭기 때문이다. 흔히 계몽의 시대, 이성의 시대, 백과사전의 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는 근대유럽의 소위 ‘고급문화’가 ‘발명’된 시기이며 미학이 철학의 독립 분야로 자리잡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 문화의 전례 없는 폭발적 융성은 이전 세기 과학의 발달로 인한 산업의 발전과 무역·교역의 확대, 인쇄·출판시장의 확장, 도시의 발달, 상당한 규모의 중산층 형성이 뒷받침한 것이다. 이는 자본이 몰린 대도시를 중심으로 문화소비자의 등장과 함께 극장, 콘서트홀, 전시장, 서점, 독서클럽, 신문·팸플릿의 일상화,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획득한 상업적 예술가 집단의 등장 등으로 이어졌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조선의 18세기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에 대한 고집스런 옹호와, 근대의 화려하고 사치스런 상업적 도시문화에 저항하는 자연주의 및 원시주의가 공존하기는 했지만, 고전에 대한 옹호는 모방이 아니라 고전을 넘어서려는 정신에 근거하였으며, 자연주의 및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 역시 지역문화와 민속에 대한 지적인 관심으로 연동되었다. 당대 백과사전의 편찬이 대표하듯 이 시대의 정신은 근대세계의 실용적, 기술적 향상과 이를 활용한 상업적 활동에 긴밀히 연루되어 있었다. 유럽문화사에서 18세기의 이러한 특징은 익히 알려져 있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동시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흐름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면, 그리고 유사한 시대정신이 18세기 조선 한양거리의 일단의 지식인들 사이를 휘돌고 있었다면 어떨까.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간서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들려주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읽으면서 내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18세기에 중국, 조선, 일본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백과사전 출간이 거대한 지식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새삼스러웠고, 18세기 유럽의 경제, 사회, 문화를 부흥시킨 시대정신이 같은 시기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호기롭게 융성하고 있었던바, 그렇게 오래전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전지구적으로 형성되어 직간접적으로 소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자 한정주는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원중거, 유금 등등의 북학파 지식인들이 이전 시대의 지식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조선의 18세기를 만들었는지를 풍부한 예시와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명의 멸망과 청의 건국이 중화의 권위의 와해로 이어진 상황에서,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선진적이고 세련된 제도와 문물을 직접 접촉했던 이덕무(李德懋, 1741~93)는 중화는 선진이요 오랑캐는 미개라는 화이관(華夷觀)을 시대착오적인 사고라고 보게 되었다. 화이론적 세계관의 해체와 함께 이덕무를 위시한 당대 조선의 선구적 지식인들은 자기 삶의 근간인 조선의 역사, 문화, 풍속, 지리에 관심을 갖게 된 동시에 조선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파격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해체하고 탐구하고 확장하고 실험하는 정신으로 가득한 각각의 장들을 재미나게 읽다보면 “지성사를 주의나 사상, 이론보다는 개별적 지식인들의 언행, 저술, 기록을 통해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구체화되었음을 보게 된다. 500면 넘는 분량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다양한 분야에 박학다식했던 이덕무의 새로운 관심사와 저작들이 나온다. 그가 관심을 보였던 분야의 다양성과 그 탐구심의 깊이뿐만 아니라 실질적 연구성과의 양적· 질적 세밀함 및 통찰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실학자들의 지식혁명

 

저자에 따르면 이덕무를 위시한 북학파 지식인들은 기존 성리학의 절대적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적 독립을 추구하며 주체적 시선과 사유를 통해 자기 자신과 세계,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고자 했다. 성리학에 근거한 당대 사대부의 문화·지식권력이 경전 및 사서의 학습과 성현을 모델로 한 삶의 모방에 집중했던 데 반해 북학파 지식인들은 문학, 역사, 철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의학, 과학, 기술 등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섭렵해 집대성하겠다는 위대한 지적 모험의 여정”을 실천하면서 박물학 혹은 백과전서파를 형성하게 된다. 저자는 사유와 지식의 영역의 이러한 확장을 가히 “지식혁명”이라 부를 만하다고 평한다.

 

이에 따라 북학파 지식인들은 성리학에 정초한 당대 주류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독서법, 사유, 글쓰기를 실천하였다. 개인적 감상을 덧붙이자면, 시를 관념에 의존해 장식하지 않고, 자연에서 느끼는 순진무구한 감정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시인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의 재료로 구성하는 이덕무의 영처시학(嬰處詩學)은 가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 Wordsworth)의 시학에 견줄만 하다. 북학파 지식인들이 체면을 개의치 않고 구사했던, 형이상학적인 글쓰기가 아닌 수필, 기록, 여행, 일기문학 등의 형식은 18세기 유럽에서 만개했던 글쓰기 형식이기도 하다. 이렇듯 북학파 지식인들은 기존의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해체하고 소위 ‘잡학’이라 경시받던, 실생활에 유용한 실용지식을 지적사유의 대상으로 확장했으며, 일상에 존재하는 ‘사소하고 하찮은’ 수많은 지식을 학문의 영역으로 포섭했다. 나아가 조선 밖의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당대 사대부가 미개하다고 업신여겼던 청과 일본을 교두보로 동남·서남아시아 및 서양의 학문, 기술, 풍습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탐구했다.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적 권위에 기대지 않는 호기로운 정신은 개성과 개인적 취향 및 기호에 대한 스스럼없는 인정과 자유로운 표현으로 이어졌는데, 사족을 달면 영국 18세기 문화를 설명하는 핵심 단어중 하나가 또한 ‘취향’(taste)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출현이야말로 인문학의 개방성과 확장성 그리고 혁신성과 창의성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본다.

 

중화사상이 해체되자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부르며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시대착오적 객기를 부렸던 폐쇄적이고 졸렬한 당대 조선의 사대부, 과거시험에 조율되어 있던 이들의 협소한 지식활동,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명분을 빙자해 악습을 일삼고 거만을 떨거나 체면만을 앞세워 생업을 경시하고 농상공을 천시했던 사대부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북학파 지식인들의 비판은 통렬하다. 특히 “사대부가 상공인으로 변하는 일이야말로 조선 개혁의 첫 단추”라고 여겼던 이들의 사상은 신사계급이 주도적으로 상공업에 뛰어들어 산업화를 주도했던 유럽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것이 불러왔던 폐단을 감수하고서라도 어찌되었든 이용후생에 근거한 개혁이 실현되었더라면 우리가 근대에 좀더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어쩌면 우리의 근대와 현대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꿈같은 상상을, 이런 시국이기에 더욱 절실한 그런 상상을 해본다.

 

박여선 / 영문학자

2017.2.8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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