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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이라는 혼란스러움

허지웅

허지웅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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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감독 이현승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김기덕의 수상은 자랑스러우면서 한편 부끄럽다. 사실 한국영화계가 그에게 해준 것이 없다” “다른 바람은 없다. 김기덕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은 우리나라의, 우리 영화계의, 기념비적인 일, 축하의 의미에서 멀티플렉스 중 한개 관은 <피에타>를 상영해줬으면 한다. 우리 영화계가 적어도 이 정도는 김기덕에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와 같은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 여태 그가 말하는 ‘영화계’라는 것이 특정 감독을 찍어 홀대라도 해왔다는 이야기인가. 다른 감독들은 영화계로부터 혜택이라도 받아왔다는 건가. 여기서 말하는 영화계라는 것이 혹시 감독조합과 제작가협회와 영화인노조와 홍보배급사 같은 것들을 포함한 표현인 건가. 그렇다면 그게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누굴 찍어 홀대를 하고 말고 하나. 아니 그 상상의 권력조직이 어떻게 구성되든, ‘영화계’라는 표현으로 호칭 가능한 그룹이 언제부터 그리 응집력있게 헤쳐모이는 이해집단이었나. 세명만 모여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김기덕 수상소식과 한국영화계의 자성?

 

한국에서 영화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 거대 제작사가 극장을 운영하고, <도둑들>이든 <광해>든 자사 영화를 자사 스크린에서 좀더 많이, 오래 상영하려 한다. 그러한 과잉 배급권력이 교차상영(관객이 적은 작품을 조조나 심야 시간대에 배정하는 방식) 같은 풍토를 만들어낸다. 그건 따로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할 일이다. 상찬을 위해 동원되어 거칠고 단순하고, 무엇보다 ‘뜨겁게’ 건의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둘러싸고 이런 종류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왔다. 최광희라는 칼럼니스트는 “(<피에타>가) 무식한 관객들에게는 재미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무식한 말 자체에 대해 논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요는 개인의 성취 앞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하는 익숙한 욕망이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둘러싸고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으며, 그것이 김기덕이라는 특수한 좌표와 만나면서 따로 떨어져 정밀하게 논의되어야 할 주제들을 뭉뚱그려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김기덕 개인과 김기덕의 개별 영화와 국격을 향한 욕망과 산업의 문제 같은 것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 마구 뒤섞이고 굴절되어 끝내 ‘인간 승리’에 대한 인상비평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심형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김기덕을 호출하는 문장들에서 김기덕이라는 이름 대신 심형래를 집어넣으면 <디 워> 개봉 당시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충무로로부터 소외받은 감독. 정규 코스를 밟지 않은 감독. 해외로부터의 인정. 안하니까 못하는 것이다. 아리랑. 이 사람들은 김기덕을 ‘성공한 심형래’로 만들고 싶은 것인가. 물론 김기덕이 예능프로에 나와 속내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를 괴물이라 소개하고, 상을 받으면서 아리랑을 부르는 풍경들이 이에 호응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기덕 개인에 대해 모를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관심있고 좋아하는 건 오로지 김기덕의 영화다. 이 모든 소음 속에서 정작 김기덕의 영화 자체는 소외되어 있다.

 

논란 속에 소외된 그의 영화

 

김기덕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리얼리즘 성향이 각광받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김기덕이 만드는 이미지 서사 위주의 영화는 쉽게 채택되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김기덕은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저예산이라는 환경에서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같은 고민의 시간 속에서 김기덕만의 인장(印章)이라 부를 만한 성격이 그의 영화 안에 차츰 구축되었다. 그는 빨리 찍었다. 낭비를 최소화했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재빨리 타협했다. 이를테면 앞뒤가 꼭 들어맞는 선명한 이야기 전개와 높은 수준의 기술적 마감을 포기하는 대신,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으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했다. 김기덕의 영화는 종종 단 몇컷을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구구절절 앞뒤로 설명을 덧붙인 결과물처럼 보였다.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는 대사가 적을수록 단점이 덜 드러나고 장점이 부각되었다. 반면 대사가 많을수록 서사의 구멍이 크게 다가왔고 분절된 상태로 장황했으며, ‘알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흔히 김기덕의 영화를 소통의 의지가 없는 산물이라 이야기하지만 그 반대다. 김기덕의 영화는 그 동력이 좌절감이든 인정욕구든 애정결핍이든 사랑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꾸미는 화장술이든, 혹은 그 모든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아무튼 멈추지 않고 소통을 위한 태도를 다듬어왔다. 끝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 그리고 <빈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같은 시기를 기점으로 힘이 빠져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흥행은 없었다. 영화들은 점점 더 피해의식과 인정욕구에 함몰되어갔다. 감독은 더이상 국내에서 자기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때마침 악재가 겹쳤다. 촬영 중 배우가 죽을 뻔했다. 제자라 할 수 있던 장훈 감독이 자기 품을 떠난 데 대한 (다소 과잉된) 충격과 배신감이 극심했다. <비몽> 이후, <아리랑>으로 살풀이를 하기 전까지 그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피에타> 이후를 기대한다

 

<피에타>는 여전히 앞서 말한 경향성 위에 서 있는 영화다. 이미지 서사이고 상징이 흩뿌려져 있는 건 변하지 않는 태도다. 여기에는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특정한 이미지들이 있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야기들이 성기게 붙어 있다. 그러나 관객이 불편해할 만한 김기덕 영화만의 인장은 최소화되었다. 외부의 반응을 끊임없이 의식해 검열하고 윤색하는 가운데 완성된 영화다. 결국 대부분의 장치나 아이디어들, 이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짐작 가능한 컷들마저 기존 김기덕 영화의 피상적인 답습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청계천을 무대로 자본의 착취와, 착취의 중계와 , 그 과정의 물리적 폭력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현실에 대한 정교한 성찰이나 구조적 문제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비평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애초 단 한번도 김기덕의 영화가 목적하지 않은 지점이다. (누구 들으라고 외치는 듯 보이는) “돈이 그렇게 좋니?” 정도가 이 영화의 현실감각이고, 현실감각은 김기덕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이 없다. 그와 별개로 나는 이 영화를 미학적 퇴행이라 생각한다. 나는 김기덕의 영화가 오히려 예전의 ‘불편하다’고 치부되던 시절을 복기해주길 희망한다. 지금의 달뜬 분위기가 감독에게 다른 것보다 오직, 자신감을 되찾아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12.9.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