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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환 『언던 사이언스』

김태호

“진실이기 때문에”가 아니라면,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현재환 『언던 사이언스: 무엇이 왜 과학의 무대에서 배제되는가』

 

 

gfgfnn얼마 전 강의 시간에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이라고 운을 떼며 황우석 사건을 입에 올린 일이 있었다. 갓 스물 넘었을 학생들이 낯설어하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정직하지 못한 과학자가 거짓 약속으로 사람들을 홀렸고, 내부고발자와 용감한 언론인 등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분투한 결과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인가? 사실 황우석 사건은 연구진실성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났지만, 그 시작은 난자 제공 강요 등 연구원의 부당 처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줄기세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으로 논쟁의 초점이 이동한 것은 실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만일 황우석의 연구가 ‘진실’이었다면, 다시 말해 줄기세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논쟁 초기에 제기했던 여러가지 윤리적 문제들까지도 한꺼번에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줄기세포를 실제로 만들었다고 해서 난자 제공 강요 같은 일들이 용인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논쟁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라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축소되는 순간 다른 쟁점들은 모두 거기에 파묻히고 말았다.

 

쉬운 이분법을 일부러 피해본다면

 

그만큼 ‘진실’이라는 낱말, 그리고 ‘진실을 밝힌다’는 구호는 힘이 세다. 특히 자연세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한다는 과학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실 그것은 근대과학이 새로운 지식과 실천의 분야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자임했던 사명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과학이 진실을 밝히는 활동이라는 기본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존하는 과학과 사회의 시스템을 신뢰하는 이들은 이른바 ‘주류’ 과학계의 이야기를 믿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는 선동이라고 일소에 부친다. 반대로 그 시스템을 믿지 않는 이들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을 찾아내어 그들이야말로 침묵을 강요당해온 ‘참된’ 과학자라고 떠받든다. 그러나 사실 양쪽은 과학이 객관적 또는 초월적 진실을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각자 ‘내가 서 있는 쪽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갈라질 뿐이다. 그러다보니 논쟁의 상대편은 진실을 숨기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 결국은 서로를 ‘청부 과학자’니 ‘운동권 반과학주의자’니 비난하는 데 이르기 일쑤다.

 

과학이라는 것이 정말로 진실의 이데아 세계로 가는 길을 한뼘씩 줄여가는 과정이라면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그림은 천상에서 내려온 계단이라기보다는 지상에서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라가는 탑에 가깝다. 이데아 또는 초월적 진리가 있기를 바라는 인간 고유의 욕구가 과학 탐구의 동기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희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존재 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에 과학 탐구의 과정은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다. 그 고르지 않음을 인정할 때, 또는 진실과 거짓의 쉽지만 위험한 이분법에서 벗어날 때, 과학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릴 수 있다.

 

과학이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신진 과학학 연구자 현재환의 『언던 사이언스』(뜨인돌 2015)는 이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사회적 논란을 부른 과학 연구의 사례를 모아 소개하지만, 어느 쪽이 ‘진실의 편’이라고 판정하는 손쉬운 이분법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무엇이 왜 과학의 무대에서 배제되는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논쟁적 연구들이 다룬 문제는 무엇이며 다루지 않은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특정한 문제를 다른 문제보다 선호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판화에서 깎아낸 부분이 아니라 깎아내지 않은 부분이 그림이 되듯이, 과학이 무엇을 묻는가에 대한 고찰은 무엇을 묻지 않는가를 동시에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과학활동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도 사회의 일원이기에, 무엇을 탐구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시각을 확장하면, 어째서 특정한 질문은 과학자들만이 답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원자력 발전이나 광우병 위험국으로부터의 쇠고기 수입 등 사회적 파장이 큰 문제들이 과학 논쟁으로 축소되거나 환원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연구원의 처우에 대한 논쟁이 연구결과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에 가려지는 것은 옳은가? 이른바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들의 독점적인 영역이 되어서는 안되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이지만, 아니 인간적이기 때문에 빛나는 과학

 

이같은 주장(흔히 ‘사회구성주의’라고 이야기된다)이 지나치게 과격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도 들 것이다. 과학은 근대의 이성적 탐구 가운데서도 가장 촉망받는 분야였으며, 또 가장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초월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열정이 사라지면 지난한 과학 연구의 과정은 어디서 정서적 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학이 사회 안에서 구성되고 그것을 만드는 인간의 유한성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과학이 자의적으로 구성되고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사회는 그 자체로 매우 엄격한 시스템이다. 규범이나 관습 같은 것들이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생각한다면,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현대 과학에 대한 음모론적 해석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음모론적 해석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진실”이 존재하고,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소수의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해야말로 지은이가 이 책에서 “용의자 X의 과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적인 진리관에 집착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과학이 위대한 이유도, 거기에 열정을 쏟을 의미도 새롭게 찾을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제약에 묶여 있는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힘을 모아 정련을 거듭한 결과, 과학은 엄청난 규모의 지식을 축적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크게 바꿀 수 있었다.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두는 컴퓨터도, 오차 없이 달까지 갔다 오는 우주선도, 과학이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와 과학을 함께 쌓아올린 결과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값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또다른 의미의 열정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 절대적인 천상의 진리를 내가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언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를 탑이지만 유한한 내가 하나의 벽돌을 보태겠다는 열정. 그 인간적인 열정이야말로 인간이 사회적으로 구성한 그 어떤 체계 못지않게 과학을 위대하게 만든 힘일 것이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6.3.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