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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과 민주주의

최원식

최원식 /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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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대표가 집회에서 대통령을 ‘박근혜 씨’라고 호칭했다고 여당 원내대변인이 ‘석고대죄’ 하라는 논평을 낸 이후, 막말 파문이 한창 번졌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왕조의 석고대죄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다. 야당 인사들이 ‘너희도 예전에 막말하지 않았느냐’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거북한데, NLL회의록 소동에 대한 민주당의 논평에서 그예 ‘석고대죄’란 문자까지 또 튀어나온 건 해도 너무했다.

 

이러니 여(與)니 야(野)니 똑같다는 욕을 먹는 것이다. 그나저나 대통령 이름에 ‘씨’를 붙여 부를 수 있는 자유가 통용되어야 민주사회고, 좀 기분이 나빠도 참을 수 있어야 집권당의 자격일 것이다. 이게 여당의 금도(襟度)요 아량이다. 힘센 여당이 약한 야당처럼 굴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

 

호칭에 담긴 한국사회의 단면

 

그런데 과연 ‘씨’가 막말인가? 물론 문맥 따라 다르겠지만 원래 ‘씨(氏)’는 대접하는 말이다. “성씨가 어찌 됩니까?”라는 물음에 “최씨예요” 하면 실례다. 자기가 자기 성을 일컬을 땐 ‘씨’가 아니라 ‘가(哥)’를 붙여 “최갑니다” 하는 것이 예(禮)다. 요즘 호칭이 마구잡이여서 그렇지, 이름 전체에 ‘씨’를 붙이는 것은 결코 막말이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의 호칭 인플레이션은 심각하다. 성도 빼고 홑이름만 부르는 것이 일상화한 서양까지 갈 것 없이 가까운 일본을 보자. 한국말처럼 존비법이 발달한 그 나라조차 호칭이 우리보다 민주적이다. 우리로 치면 ‘씨’에 해당하는 ‘상(さん)’이 지금도 일반적이다. 수상은 ‘아베 상’, 사장은 ‘샤쪼오 상’ 하면 된다. 예전엔 우리도 ‘씨’ 또는 ‘형(兄)’을 붙이는 게 보통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아무나 ‘선생님’이다.

 

그래서 한일 지식인들이 만난 자리에서는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지곤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에게도 으레 ‘상’을 붙이다가 한국인들이 자기들에게 ‘선생’도 모자라 ‘선생님, 선생님’ 하는 걸 눈치채고 덩달아 ‘센세이(先生)’라고 호칭을 변경하곤 하던 것이다. 일본은 ‘선생’에 ‘님'(樣, さま)을 붙이지 않는다. ‘선생’이 최고다. 우리도 원래 ‘선생님’보다 ‘선생’이 훨씬 격이 높았다. ‘율곡 선생’이라고 하지 누가 ‘율곡 선생님’ 하는가? 무장(武將)의 경우도,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지 ‘이순신 장군님’이라고 촌티를 내지는 않는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세종’을 ‘세종대왕’ 또는 ‘세종대왕님’ 하면 우습다. 특히 ‘대왕님’은 밝은 임금이기보다는 마계(魔界)의 보스처럼 들려 더욱 그렇다. 궁중 호칭에 흥미로운 예가 있다. ‘마마’와 ‘마마님’ 중 누가 높은가? ‘상감마마’ ‘대비마마’ ‘동궁마마’ 등등 지존에게는 ‘마마’지만, 상궁(尙宮)은 ‘마마님’이다. 요컨대 ‘님’ 자를 붙이면 한수 아래였다.

‘씨’를 사용하는 관행이 그래도 잘 지켜지는 곳은 언론이다. 요즘은 조금 흐트러졌지만, 특히 예전 신문은 예외 없이 평등하게 ‘최원식 씨’라고 지칭했다. 같은 기사 안에 두번 나올 때는 ‘최씨’ 또는 ‘씨’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특히 ‘최씨’에는 약간의 알레르기도 없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공설운동장에 갈 때면 스피커에서 ‘운동장 최씨, 운동장 최씨, 본부석으로 오세요’ 하는 방송이 자주 나와 내심 그 최씨가 누군가 궁금해하던 기억이 불쑥불쑥 올라왔기 때문이다.

 

당당한 외침이 필요할 때

 

선배기자들이 초임기자들에게 신칙하는 게 두가지 있단다. 첫째, 대통령과 악수할 때라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라. 아니 고개를 일부러라도 뒤로 젖히라고 한단다. 정말 최근 한국의 악수는 가관이다. 미리 절하고 나아가, 다시 절하면서 두 손으로 싸쥔 채 황송히 악수하고, 물러나면서 다시 절하니, 어쩌면 이렇게 비굴할까? 자존(自尊)하면서 평등한 악수예절의 교육이 정말로 급하다.

 

둘째, 결코 ‘님’ 자를 붙이지 말라. 그러고 보면 발음하기도 힘든 ‘대통령님’도 우습다. ‘대통령 각하’라는 말 자체의 독재를 개혁했지만 뭔가 과도적 조처가 필요했던 김대중정부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이제는 그만하면 ‘님’ 자를 뗄 때가 되었다. 진짜 위인들은 ‘선생’마저 떼고 홑이름으로 회자된다. 플라톤은 그냥 플라톤이다. ‘민낯’처럼 ‘민이름’이 최고의 경지다.

 

지금부터라도 호칭의 인플레를 가능한 한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한번 올라가면 내려가기 힘들다. 그러니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누구 씨’라는 호칭이 어떤 심리적 장애 없이 발화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사회적 습관을 조정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석고대죄’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쉽게 구사하면서 상대의 발언을 억누르려는 유혹은 사실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유해하다. 자기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면 창조는커녕 반(反)창조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다. 표현의 자유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발양이야말로 발랄한 창조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로 가는 호칭의 다운싸이징을 위하여 대한민국 국민에게 ‘박근혜 씨’를 허(許)하라!

 

2013.11.20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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