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권하는 사회

차미령

차미령 | 문학평론가

이런저런 일로 해서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한분을 세차례 뵐 기회가 있었다. 처음 뵈었을 때 여차저차 소개를 올리자 넌지시 물으셨다. “자네 혼인은 했는가?” 요즘은 쉬이 쓰지 않는 혼인이라는 단어가 은근히 멋스러웠고, 그래서인지 그 질문이 그리 거북하지는 않았다. 두번째 뵈었을 때도 같은 말씀을 던지셨지만 그러려니, 했다. 겨우 두번째 대면이었고 그러니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번 반복되면 우연이 필연이 된다고 하던가.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그 어르신은 식사중에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그런데 자네 혼인은 했는가?”

종종 들르곤 하는 인터넷 모 싸이트 게시판에는 지난 추석 연휴 동안 이런 종류의 상황을 탄식하는 글들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결혼은 왜 안하는 거냐, 눈이 높은 거냐, 노력을 안하는 거냐, 선이나 봐라……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이라든가 백수들에 못지않게, 30대 씽글들 역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안부인사가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여자(남자)가 반인데 뭘 망설이느냐고? 어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는 주변의 다정한 관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인한 것이다. ‘인연’이라는 낭만적 우연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발벗고 뛰어야 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듯, 자신의 상품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냉정히 가늠해보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결혼정보회사의 세분화된 등급이 특정 직업에 대한 사회적 지위의 척도로 통용되기 시작한 지는 벌써 오래다.

꼭 그렇게라도 해서 짝을 만나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과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처럼 이 시련을 무사통과하고 싶다는 욕망이 뒤엉켜 만혼(晩婚)시대 젊은이들의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계급, 권력, 성, 가족제도 등이 얽혀 있는 이 세계의 복잡한 지형도는 세태에 밝은 젊은 작가들에겐 매력적인 소재다.

김윤영의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문학수첩》 2006년 가을호)에서 결혼이라는 “과열경쟁 시장”을 “블루오션” 전략으로 돌파하려는 주인공은 자신의 결혼 전망을 마치 주식시세처럼 분석한다. “부잣집 공주님”이나 “희귀한 고소득 전문직”이 아닌 이상 더욱 냉철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작품 속 여성 펀드매니저의 내면은, 만에 하나 성공적인 결혼을 못한다면 인생의 하향곡선의 경사가 가팔라질 것이라는 불안심리로 얼룩져 있다.

그런가 하면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문학판》 2006년 가을호)는 또 어떤가. 다소 주변적으로 처리되고는 있지만 ‘짝짓기’에 작용하는 계급과 성의 함수관계에 대한 백가흠식 문제제기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소설의 서두에 묘사된 것처럼 대리운전기사 ‘조대리’에게 관건은 “가능성 있는 여자”를 찾는 것이어서 “생각보다 예쁜 여자의 외모”는 오히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폭력에 쉽게 호소하거나 혹은 퇴행적인 면면을 보이는 백가흠의 남성인물들은 생존(번식)의 본능적 욕구가 현실과 만나 일어나는 불협화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들에게 결혼이라는 제도적 안착은 어불성설이다.

그 어조가 냉소적이건 풍자적이건 혹은 자학적이건, ‘결혼은 선택’ 나아가 ‘미친 짓’임을 도발적으로 규정하는 소설들의 맞은편에, 이를 생존의 문제와 결부시켜 고찰하는 소설들이 자리한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사회의 많은 평범한 씽글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결혼의 무게는 여전히 후자 쪽에 좀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길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씽글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배척당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특정한 연령대를 지나면 ‘결혼 이외의 삶’에 대해 상상하는 것조차 봉쇄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씽글은 언제까지나 비혼(非婚)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미혼(未婚)일 뿐이다.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까닭이나 혹은 반대로 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 연유는 다양하겠지만, 그것이 무심한 권고이든 절박한 채근이든 주변의 결혼 강요가 씽글들을 옥죄면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만을 이구동성 가리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 혹은 우리의 이웃들은 너도 나도 ‘아주 쉽게’ 결혼을 권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사 대신 전하는 안부인가, 타성에 젖은 관습인가? 국가의 안위와 미래를 우려하는 애국심의 발로인가, 타인의 고독을 연민하는 착한 이웃사랑인가? 인생의 참맛을 전파하고 싶은 전도심인가 아니면,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놀부심보인가? 짧기만 한 소견으론, 출산율 걱정하시는 분들은 쌍춘년을 맞아 러시를 이루는 결혼행렬을 보고 조금 안심하셔도 될 듯하고, 누군가의 말년을 염려하시는 분들은 TV 리퀘스트 프로그램에 전화 한통 하시는 게 더 나을 듯도 싶은데 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결혼을 강권하는 사회에 초연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 아랑곳하지 않는 천하장사급 뚝심과 그것을 뛰어넘는 마돈나급 파워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가을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게 본, 노동계급 출신의 트랜스젠더 성장담을 여유있게 펼쳐낸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이질적인 두 단어를 조합해낸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남성적 가계에서 자란 소년(/녀)의 여성적 꿈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국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성적 소수자를 다룬다는 점에서 게이 카우보이들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린 미국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혹은 의심하며) 사회가 강요하는 바를 따라야 했던, 그래서 차마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이 속울음을 삼키던 카우보이들과는 달리,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인공 오동구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전진한다. 물론 그 씩씩함의 근원이, 영화가 주인공의 재탄생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 막을 내린다는 점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영화가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시종일관 따스하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팝가수 마돈나의 노래〈Like a Virgin〉을 부르는 오동구는 너무나 대견해서 보는 사람을 뿌듯하게 한다. 영화 속 오동구를 보고 있노라면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사랑스러움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랑스러움이다. 오동구는 아마도 앞으로 더 외롭겠지만, 인생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기에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올해 유난히 휘영청 밝은 추석 달을 보면서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오동구들은, 사회의 태클에 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면서 살아가게 해달라고 소원했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남녀들이 제 짝을 만나기를 기도하는 대신, 차라리 그 오동구들 틈에 지금 이대로의 삶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음에도 결혼을 종용당하는 씽글들을 나란히 세우고 싶은 마음은 과연 지나친 것일까. 때는 바야흐로 다시 결혼의 계절이다.

2006.10.10 ⓒ 차미령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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