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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안에 갇힌 시를 넘어서

손택수

손택수 | 시인

매체가 바뀌면 감각과 사유의 패턴마저 바뀐다고 했던가. 맥루언(M. Mcluhan)이나 옹(W. Ong)의 지적대로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활자형 인간의 형성은 구술문화(口述文化) 단계에선 볼 수 없었던 개인주의를 탄생시켰다. 말소리와 함께하던 청중공동체가 사라지고, 폐쇄적 텍스트 안의 문자 속에 칩거하는 개인 독자가 출현한 것이다. 우리 시인들 중 매체의 변화에 따른 인류문화사의 전개를 가장 첨예하게 인식했던 이가 바로 신경림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시를 보면 정말 답답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 원인의 일부는 (시가) 활자 내지 글자 속에 갇혀버려 그런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말이 활자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요즈음의 우리 시다.” 현대시가 잃어버린 민중과의 유대를 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시와 민요의 관계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 아래 씌어진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구술성과 공동체의식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경림은 이런 비판의식을 토대로 구술성에 대한 지향을 통해 붕괴된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구체화한다. 그것의 시적 실천이 민요시였고, 이야기의 중시였다. 구술문화가 기억하기 쉬운 리듬 단위와 이야기 속에 정보를 담는 방식으로 지속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여기에 공유적 미학에 바탕을 둔 평이한 언어들이 선택되는데, 그는 비유어를 쓰더라도 ‘대낮처럼 달빛이 환하다’처럼 상투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독창성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그의 문법은 자필 서명이 없는 구술문화를 내면화한 시인의 운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의 젊은 시들은 구술문화적 상상력을 통해 어떤 낯선 시보다도 더 낯선 남다른 개성을 선보이고 있다.

아라리가 난거랑께 의사 냥반, 까운에 환장허겄다고 달라붙는 햇살이 아라리가 나서 꽃잎을 흔들자뉴 오메 發病 원인은 불안 강박 공황발작, 이런 게 아니라 아라리가 나서 그렇탕께 왜 심전도는 찍자 그러능규 술판서 언 눔이 아리랑을 불러 재끼는디 아라리가 헉 하고 피를 토해내능규 복분자가 요강을 뒤집어엎는 것 맹기루 내 몸도 이렇게 뒤집어서리 환장허겄다고 나도 아라아리가 나아안네 부르고 있는디 내 몸이 꽃이파리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디 그 냥반들이 응급실에다 나를 쳐넣은규 숨이야 아라리가 쉬겄지 심장이야 지 혼자 팔딱팔딱 하는 거구 긍께 의사 냥반 이 담에 병원 와서 불안하고 우울하담서 뒤집어 자빠진 사람 있으믄 아리랑 한번 불러주슈 아라리 땜시 잠시 잠깐 그랑깅께, 저 꼰잎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아라리 몸 좀 보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믄 아라리 한번 재껴부리믄 돼쥬, 나 갈라유! (박진성 <아라리가 났네> 전문)

이 시에 나오는 화자의 방언과 아리랑 후렴은 ‘귀에 친근한 언어형식’으로서 시각적 질서보다는 청각적 질서에 봉사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해 마치 화자의 말소리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독자가 ‘듣는 독자’, 즉 상상적 청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눈여겨볼 점은 ‘불안 강박 공황발작’ 같은 근대 의학권력의 명명을 아리랑의 고유한 리듬과 화자의 구수한 입담에 기댐으로써 무력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화자의 ‘發病’은 아리랑의 ‘발병’과 음성적으로 겹치면서 병명의 심각함으로부터 능청스러운 신명으로 가볍게 옮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의 발병이 아리랑 텍스트처럼 어떤 상실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상실에 의한 발병의 고통이 상실에 의한 아리랑의 고유한 신명으로 치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문명병이랄 수 있는 ‘공황발작’이 ‘아리랑’으로 상징된 구술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치유받고 있는 것이다.

아래 시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구술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선형적인 시각 공간 속에 포획된 말들이 어떻게 꿈틀거리는가를 보라.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 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 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장을 향해 입을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 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 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 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 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김진완 <기찬 딸> 부분)

기차 안에서 태어난 화자의 어머니 이야기가 판소리 사설 같은 걸쭉한 입담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능수능란한 ‘이야기 가인’처럼 시인은 혼합화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기차라는 비속한 출생공간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힘에 의해 축복의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화자의 어머니는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고 말할 줄 아는 여장부다. 정말 “기찬,/기-차-안” 딸인 것이다. 구술공동체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생동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이 시를 표제작으로 한 김진완의 시집 ≪기찬 딸≫은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민중시의 푸짐한 성과가 아닌가 싶다.

구텐베르크의 혁명 이후 인쇄술의 도래는 시각을 감각체계의 최정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이전 시대의 중심감각이었던 청각을 억제했다. 시각 중심의 제한된 감각기관이 전면에 나섬에 따라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참여자라기보다는 관찰자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묘사적 글쓰기’ ‘내면의식의 탐구’ 같은 개념이 탄생한다. 상상적으로나마 청자를 전제에 둔 구술적 글쓰기는 이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6.06.06 ⓒ 손택수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