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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2회

노인은 진구가 삼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 대사 중에 진구의 번호를 부르는 게 있었거든요. 오늘이 삼일이니 삼번 발표해봐, 아마도 그렇게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삼일이네요.” 노인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가 노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매일 한장씩 뜯어야 하는 일력이 벽에 걸려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데 저 일력을 누가 매일 뜯는 것일까, 그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일력은 꽤 높이 달려 있어서 앉은 채로는 뜯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 오늘이 삼일이니까, 어디, 삼번 발표해봐.”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삼십팔년 전, 그때의 선생님으로 되돌아간 듯한 웃음이었다. “네, 선생님.” 그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앞으로 누군가 진구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진구는 동구국민학교에 다녔고, 일학년 일반이었고, 삼번이었고, 반장이었다. 그리고 딱지왕이기도 했다고. 다시는 의젓한 아이라거나 기특한 아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그는 잊고 있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누군가 출연 중인 아이들의 옷을 몽땅 훔쳐간 사건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몽땅! 그날은 교실 촬영은 없고 운동장 촬영만 있던 날이었다. 아이들은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관광버스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온 옷들은 버스 안에 벗어 두었다. 포크댄스를 배우는 장면을 찍었는데, 극중에서 한달 후에 봄 운동회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선생님이 와서 춤을 가르쳤다. 여선생이 담임 선생님과 손을 잡고 춤 시범을 보일 때 아이들이 부끄럽다고 소리를 질렀다. 남녀가 손을 잡고 추는 춤이라니. 몇몇 아이들은 상대방의 옷소매를 잡고 춤을 추었다. 진구는 춤을 못 추었다. 작가가 원하는 모습은 진구가 좋아하는 여학생과 손을 맞잡고 수줍게 춤을 추는 거였다. 그 장면을 예쁘게 찍어달라고 대본을 건네며 PD에게 당부를 했다. 그는 여자아이와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뻣뻣해지고 얼굴이 굳어졌다. 손에서는 땀이 났다. 몇몇 아이들은 같이 춤을 추는 짝이 마음에 안 든다며 투덜댔다. 심지어 우는 여자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통제가 되지 않았고, 진구는 춤을 엉망으로 추었고, 그래서 촬영은 오래 이어졌다. 진구와 짝이 된 여자아이가 신경질을 냈다. 한달 전에 전학 온 아이였다. 전학을 온 날, 분홍색 에나멜 구두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와서 다른 아이들의 질투를 받았다. 그 아이는 촬영장에 올 때마다 매번 다른 구두를 신고 왔다. 그는 구두가 그렇게 많은 사람은 그때 처음 보았다. 그는 촬영장에 가면 전학생의 신발부터 보곤 했다. 오늘은 어떤 구두를 신고 왔을까. 구두는 늘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날 포크댄스를 추면서 그는 전학생의 구두를 여러번 밟았다. 간식으로 소보로빵과 우유가 제공되었다. 먼저 빵을 받겠다고 새치기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는 간식을 먹을 때면 늘 줄의 마지막에 섰다. 녹화장에서는 진구였으니까. 진구 앞에 서 있던 전학생이 빵을 건네주는 조연출에게 두개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안 돼, 일인당 하나야. 조연출이 말했다. 그러자 전학생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다. 그는 그 모습이 만화책에서 본 어느 장면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똑 부러지게 어른들에게 항의하는 아이의 모습은 만화책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를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린 점심도 안 먹었어요, 이건 아동 학대예요. 전학생이 말했다. 조연출이 전학생의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였다. 그때, 버스에서 한 아이가 이렇게 소리쳤다. 없어졌어. 모두 다 없어졌어. 빵을 먹다 말고 아이들이 버스로 달려갔다. 옷이 몽땅 사라졌다. 아역 배우들 중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도둑맞은 옷들 중 비싼 것이 많았다. 그는 잃어버린 옷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새 잠바를 가지고 싶었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허리띠는 아까웠다. 버클에 해골이 새겨진 허리띠였는데, 형구가 극중에서 하고 다니다 그에게 준 것이었다. 허리띠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허리띠만 차면 영웅이 된 것처럼 용기가 생기곤 했다. 몇몇 아이들은 울었다. 주머니에 천원이나 있었다고 우는 아이도 있었고, 엄마한테 혼나는 게 무서워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서글피 우는 아이는 전학생이었다. 남학생들이 전학생을 빙 둘러싸고 위로를 했다. 괜찮아. 엄마한테 안 혼날 거야. 비싼 옷이야? 주머니에 돈 있어? 곧 범인을 찾을 거야.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울며 전학생이 말했다. 그깟 옷, 또 사면 돼. 누군가 그럼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학생이 꿀밤 때문이라고 말했다. 꿀밤을 맞았다고. 그는 아이들과 떨어져 빵과 우유를 들고 운동장 스탠드로 걸어갔다. 거기 앉아서 소보로빵의 바삭한 겉면을 뜯어먹었다. 달콤했다. 달콤함이 사라지기 전에 우유를 한모금 마시면 소보로의 맛이 입안으로 가득 퍼졌다. 빵을 먹으며 그는 꿀밤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누가 그런 말을 붙였는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하나도 달콤하지 않았다. 남의 머리를 때리면서 거기에 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다니. 그는 앞으로 꿀밤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겉면을 뜯어먹은 후 말랑말랑한 속살만 남은 빵을 동그랗게 뭉쳤다. 빵은 탁구공만큼 작아졌다. 손바닥의 때가 묻어서 빵도 더러워졌다. 서너명씩 모여 있는 아이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님들과 우왕좌왕하는 스태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쌤통이다, 하고 중얼거려보았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그 말을 들었을까봐. 그런 나쁜 생각을 하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진구라면 그런 말을 해선 안 되니까. 그래도 자꾸만 쌤통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누가 옷을 훔쳐갔는지 모르지만 영영 잡히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소원대로 도둑은 잡히지 않았다. 봄 운동회 촬영을 끝으로 전학생은 다시 전학을 갔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그는 전학생과 포크댄스를 추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전학생의 구두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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