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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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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님이 처음 내게─일대일로─시킨 일은 서류 철하기였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책 작업에 막 투입되던 때였다. 그는 내게 딱딱한 검은색 바인더를 건네면서 번역을 맡겼던 중국, 대만, 일본의 해제 원고가 마침내 다 돌아왔으니 출력해서 책에 실릴 순서대로 철해달라고 했다.
  나는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것을 깨끗하게 치우고, 막 출력한 따끈따끈한 문서를 왼편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펀치로 구멍 뚫는 작업을 시작했다. 바인더의 두께는 국어사전만 했고,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 고리가 세개 있었다. 손에 힘을 줘서 양쪽으로 벌리자 은색 고리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그 간격에 맞춰 연필로 표시한 다음, 조심스레 구멍을 세개씩 뚫었다.
  더운 오후였다. 단순작업을 반복하다보니 점점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편집실에서는 가장 더운 오후 두세시간을 제외하고는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실장님이 에어컨 냉기를 싫어해서였다. 선풍기도 있었지만, 지난번 선풍기를 켰을 때 책상 위 종이들이 펄럭대고 급기야 사방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니 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빼고 선배들의 동정을 살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선배들 중 한명이 조용히 책상 뒤를 돌아다니며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곤 했는데, 그날은 다들 더위를 느낄 새도 없는 듯 일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졸음까지 몰려오니 이마에 땀이 배었다. 고리에 맞춰 연필로 표시하고 구멍을 뚫는 일조차 짜증스러웠다. 나는 겨우 종이에 구멍 뚫는 작업을 마쳤다. 반으로 쪼개진 고리 양쪽에 종이를 끼워 넣은 다음 고리를 맞물리게 했는데, 좀 빡빡한 느낌이었다. 얼핏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인 내가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바인더를 그대로 부장님께 가져다 드렸다. 아마도 인턴으로서의 자아가 잠시 더위에 녹아 없어졌던 게 아닐까.
  “벌써 다 했어? 빨리 했네. 수고했어.”
  부장님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가워하며 바인더를 받아들었다.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보는 체하며 부장님이 파일을 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앞에서부터 한장씩 페이지를 넘겼는데, 얼마 못 가 종이가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짜증으로 찌푸려졌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안경을 다시 썼는데, 뜻밖에도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야지.’
  이 대목은 모호한데, 왜냐하면 그가 그런 말을 실제로 했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순간, 그의 생각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불렀다.
   “지향씨, 이리 와봐.”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펀치도 가져와봐.”
   나는 죄를 지은 심정으로 부장님 옆으로 갔다. 그는 내 앞에서 한장 한장 종이를 넘겨 보였다.
  “이것 봐. 안 넘어가잖아.”
  “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입을 꼭 다물었다.
  “이렇게 문서가 많으면 잘 뚫는다고 뚫어도 뒤로 갈수록 점점 빡빡해서 안 넘어가거든.”
그가 참을성 있게 설명하며 양손으로 고리를 열었다.
“이럴 때는 구멍을 하나만 뚫지 말고 겹쳐서 크게 뚫어.”
그는 종이를 몇장 집어 들더니 눈사람 모양이 되도록 구멍 위에 구멍을 뚫었다.
  저렇게 해도 상관없구나. 나는 동그랗게 보기 좋게 뚫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고리의 간격을 가늠하며 계속해서 구멍을 뚫었다.
  “부장님, 제가 나머지 해서 가져올게요. 금방 다시 가져올게요.”
  직장인의 자아를 회복한 내가 말했다. 그제야 완전히 졸음이 물러가고 눈앞이 선명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 파일을 펴볼 일이 많을 거야. 이런 기본적인 일을 정성스럽게 해놓는 게 중요한 거야.”
  그가 내게 바인더를 넘겨주며 말했다.
  ‘기본적인 일을 정성스럽게 해놓는 게 중요한 거야.’
  나는 자리로 돌아와 나머지 작업을 하는 내내 그 말을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혹시 인턴생활이 끝나고 이곳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내 인턴생활 삼개월을 통틀어 가장 중대한 순간이었다. 나는 짜증을 내지 않고 내게 한번 더 기회를 준 그에게 감사했다. 그 일은 하루하루 일에 임하는 나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인턴기간 동안 내게 주어진 업무 중에는 중요한 일도 있었지만 그보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훨씬 많았다. 나는 책 한권을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발송할 때도 대충 하지 않고 테이프를 깔끔하게 붙였다. 우리 회사의 책이 리뷰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할 때도 가위로 반듯하게 오려 보기 좋게 파일에 철했다. 시간이 더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아주 조금만 정성을 담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면 내 기분의 눈금도 1센티미터쯤 올라갔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법 같았다. 일상의 작은 마법.
  문득 이 이야기가 편집과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내용을 보고서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이란 무엇인가? 작은 일을 정성스럽게 챙기는 것이다.
  신입 편집자가 내릴 만한 정의로 그럴듯해 보였다. 이 정의에서 시작해, 부장님을 도와 책을 만들면서 보고 느낀 바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 글자 한 글자에 빠짐없이 시선을 주고 작은따옴표, 큰따옴표가 잘 여닫혔는지, 적절한 괄호가 쓰였는지, 각주의 숫자에 어긋남이 없는지 챙기기 위해서는 꼼꼼한 정신의 소유자여야만 했고, 작은 일을 소중히 여겨야만 했다. 목차, 찾아보기, 약력과 판권면과 도서번호까지, 챙길 것은 끝도 없었다.
  자격지심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동안 내심 인턴이라는 꼬리표가 내게 붙어 있다는 걸 느끼곤 했다. 인턴으로 채용된 사람은 정식으로 채용 절차를 거쳐 입사한 직원보다 자격이 미달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표님의 눈에도 내가 다른 직원들과 구별되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경험을 담은 이야기를 보고서에 쓴다면 내가 삼개월간 하릴없이 책상에만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던 게 아니라 실무를 충분히 경험했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 터였다.
  잠이 확 달아나면서, 나는 작게 문서창을 열고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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