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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3회

이제는 노인이 된 담임선생님이 죽기 전에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노인은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했고, 그도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인사를 하면서 그는 참 이상한 대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이 프로그램을 보지 못한다면, 아니 혹시 방송이 되기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서로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그는 왠지 노인이 이 방송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노인이 인사를 마친 뒤에도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찌된 일인지 다시 처음으로 영상이 되돌아갔다. “안녕하세요.” 백발인 노인이 인사를 했다. 그도 다시 한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방청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앞에 앉아 있던 작가가 일어나 뒤쪽으로 뛰어갔다. “얼마나 반가우면 다시 돌아오셨네요.” 사회자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을 했다. 곧 영상이 멈추었다. 노인이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화면이 멈추어서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는 여선생님과 포크댄스를 추던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선생님도 춤을 못 추어서 상대방보다 반 박자 늦게 발이 움직였다. 선생님도 여선생의 발을 밟았을까?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야기를 사회자에게 하려다가 말았다. 사고로 다리를 다친 사람에게 할 추억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스크린의 화면이 꺼졌다. PD가 녹화를 진행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진구의 소원이 뭐였는지 아세요?” 사회자가 물었다. 그는 조금 전 쉬는 시간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제 소원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진구의 소원이 기억날 리 없죠.”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 그는 자신의 말투가 퉁명스럽게 느껴져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진구 같은 아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 할아버지에게 집을 사주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요.”사회자가 대본을 들여다보고는 웃었다. “소원은 아이다웠는데요. 하루에 한번씩 짜장면을 사 먹는 거였다고 해요.” 사회자는 극 중에서 진구가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있었다고 설명해주었다. 어린이날이었는데, 할아버지의 고물상에서 짜장면 한릇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것이었다. 곱빼기 한그릇. “그런데 그 곱빼기 한그릇으로 세명이 먹었다고 해요. 이 장면은 국장님이 알려주셨어요. 어렸을 때 똑같은 경험이 있어서 그 장면을 기억한다고 하네요.” 짜장면 한그릇을 진구와 민지가 나누어 먹고 나면 할아버지가 남은 짜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그렇게 하면 한그릇으로 세 사람이 먹을 수가 있었다. 사회자의 이야기를 듣다 그는 그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구의 에피소드라는 것을 알고는 당황했다. 그는 지금까지 짜장면 한그릇을 둘이 나눠 먹었던 일이 어머니와의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면을 먹고, 어머니는 남은 짜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나는 면이 소화가 안 돼서. 이렇게 밥 비벼먹는 게 더 맛있단다. 그는 지금까지 짜장면을 먹을 때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자의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긴 했지만 짜장면 두그릇도 사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매일 밤마다 베지밀을 한병씩 사먹기도 했다. 일곱살 무렵인가. 따뜻한 베지밀을 마셔야만 잠이 오던 시기가 있었다. 암튼, 그랬는데, 그는 새로 마련한 집을 볼 때마다 짜장면 두그릇도 제대로 사 먹지 못했던 가난한 모자가 이런 집에서 살게 되었다며 감동하곤 했다. 그는 짜장면 한그릇을 나눠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따뜻한 방에 누워 있는 것도, 뜨거운 물을 펑펑 쓰는 것도, 모두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가 구두쇠가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지금도 오줌을 누고 변기 물을 내릴 때면 죄책감이 들곤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일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구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새로 산 운동화를 이불 속에 넣고 잠을 자던 기억. 돈가스를 처음 먹던 날 어머니가 크림스프에 밥 말아먹던 기억. 고구마를 먹다 혓바닥을 델 뻔한 기억. 입천장이 까지도록 사탕을 먹던 기억.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아니라 진구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애써 맞춘 퍼즐 조각이 흩트려진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전학생의 발을 밟던 것도, 꿈속에서 발을 밟고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도, 진짜였을까?

“짜장면을 실컷 먹는 게 소원인 아이라니…… 정말 옛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긴, 흑백의 시절이었으니까요.” 사회자가 말을 했다. 사회자는 열살 무렵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나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써서 은상을 받았다. 사회자는 조회 시간에 학교 단상에 올라가 교장선생님에게 상장을 받았다. 그리고 단상에 서서 「우리의 소원도 통일, 내 소원도 통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필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사회자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글짓기 대회에 나가지 않고, 상도 타지 않고, 더더욱 단상 위에서 전교생에게 글을 읽던 순간은 영영 없던 시절로. 사회자가 대회를 나간 이유는 형제들 중에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형도, 둘째 형도, 셋째 형도, 모두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왔다. 사회자는 삼일절 기념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는 남산에서 열렸는데, 사회자는 식물원 옆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같은 학교에서 온 아이들도 모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인솔 선생님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하며 노래를 중얼거렸다. 그날, 글짓기의 시제는 소원이었다. 사회자는 4년 전에 둘째 형이 썼던 글이 자꾸만 떠올랐다. 시제는 지금하고 똑같았다. 소원. 둘째 형은 매일매일 꿈이 바뀌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꿈이 하나 있다고 썼다. 그것은 통일이라고. 둘째 형은 대상을 받았고, 조회 시간에 단상에 서서 글을 읽었다. 그때 그 글의 첫줄은 이랬다. 우리는 따뜻한 방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사회자는 첫줄을 이렇게 썼다. 우리는 따뜻한 방에 누워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렇게 쓰고 나자 자신의 글과 형의 글은 완전히 다른 글 같았다. 통일이 소원인 아이가 대한민국에 한두명도 아니지 않는가. 사회자는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비슷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가 단상에 서서 자신이 쓴 글을 읽은 날, 저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셋째 형이 말했다. 너 기억력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똑같더라. 그날 밤, 사회자는 꿈을 꾸었다. 등에 날개가 생겼다. 날개가 옷을 뚫고 나와 사회자는 반팔을 입을 수가 없었다. 여름이었지만, 꿈속이었지만 더웠다, 날개를 감추려고 두꺼운 옷을 입었다. 날개가 스웨터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두꺼운 점퍼를 입었다. 옷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날개가 몸을 간지럽혔다. 꿈속에서 사회자는 계속 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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