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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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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서는 한차례 부장님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을 거친 뒤 대표님께 전달되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과제를 해결하고 나니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번 주말은 모처럼 아무런 할 일 없이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을 듯했다. 실컷 늦잠을 자고 오후에는 까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야지, 나는 생각했다. 저녁에는 혼자 맥주를 마시며 미국 드라마를 보겠어.
   1층에서 퇴근 카드를 찍는데,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은희 선배가 두꺼운 굽이 달린 워커를 신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선배, 제가 카드 찍을게요.”
   나는 선배를 향해 말했다. 출퇴근 카드는 입구에서 떨어진 1층 복도 맨 안쪽에 있어서, 직원들은 카드를 찍고 있을 때 누군가 보이면 그 사람 것까지 찍어주곤 했다.
   “아, 고마워요, 지향씨.”
   나는 은희 선배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찾아 기계에 넣었다. 딸각 소리가 나면서 시간이 기록되었다. 다른 사람의 카드를 대신 찍어준 것은 처음이었다. 별것 아닌 거였지만 회사 생활이 몸에 배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와 나는 회사를 나와 나란히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사방은 어둑어둑했지만 하늘의 한쪽 끝에는 아직 해 질 녘의 붉은빛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은희 선배에게 드디어 보고서가 통과되었다고 말했다.
   “이제 정말 푸른서재 직원이 되었네요. 축하해요, 지향씨. 축하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 그래도 축하해야겠죠?”
   선배는 만화에서 주인공이 고민할 때 그러듯 한 손을 턱에 가져다댔다.
   “뭐예요, 선배.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웃으면서 선배를 쳐다봤다.
   “사실 인턴 때도 직원 못지않게 일하긴 했죠. 아유, 말이 인턴이었지…… 심지어 멀리서 출퇴근하고 진짜 고생이 많았어요.”
선배가 따뜻하게 말했다. 그녀는 회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시니컬했고 상사들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덮어놓고 가혹한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동료 직원이나 후배들에게는 친절했다. 나는 아직 은희 선배를 잘 알지 못했다. 실은 따뜻하고 다정한 성격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느닷없이 과격한 투로 “책이고 뭐고 아무 의미 없다” “다 망해버려라”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파주로 들어오는 건 난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네. 지금이라도 번복할 수는 없는 건가요.”
   “선배, 저 이제 2주 있으면 이사예요.”
   나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현미 선배도 파주 사시잖아요. 현미 선배는 추천하시던데요?”
   “그렇죠. 그런데 현미씨는 집이 부천이잖아요.”
   은희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주중에만 교하에서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집에 가니까 지향씨랑은 경우가 좀 달라요.”
   “아……”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얘기였다.
   “몇년 계약했어요?”
   선배가 물었다.
   “일년요.”
   “오, 잘했네. 일년만 살다 나와. 돈 모아서 일년 뒤에 합정으로 나와요.”
   그때 2200번 버스가 다가왔다. 환하게 불을 밝힌 빨간색 버스는 황량한 파주에서 북적거리는 서울로 사람들을 옮겨주는 호박마차처럼 보였다. 금요일 밤, 사람들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푸근해 보였다. 버스는 금세 사람들로 찼다. 은희 선배와 나는 가운데쯤에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서서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원고는 황인수 선생님 거 하는 거죠?”
   선배가 물었다.
   “네, 선배. 근데 이 원고, 제가 봐도 되는 걸까요. 8개 국어를 하는 천재의 원고인데 신입이 봐도 되는 건지…… 부담돼요.”
   “천재요?”
   선배가 되물었다. 내 눈을 들여다보는 선배의 표정이 이상했다.
   “누가 그래요? 부장님이 그래요?”
   부장님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검색해보니까 그렇게 나오던데요. 어릴 때부터 신동이었고 독학으로 8개 국어를 한다고요.”
   “지향씨……”
   은희 선배가 내 어깨에 한 손을 척 올렸다. 순간 뭔가를 말할까 말까 갈등하는 기색이 전해졌다.
   “그 원고,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빨리 내기만 하면 되는 원고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선배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가 터놓고 말한다 해도 결코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내가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걸 선배가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원고에 대해 선배는 알고 나는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고, 그 사정이 뭔지 몹시 궁금했다. 본능적인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담당 편집자로서 맡은 원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알아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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