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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4회

   “회사에서는 황인수 선생님이랑 앞으로 여러권 책을 내려고 하거든요. 장기적으로 보는 거죠.”
   다행히 선배의 눈에도 내가 분별있는 사람으로 보였는지, 선배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황인수 선생님이랑 내고 싶은 책은 따로 있어요. 춘추전국시대 시리즈를 하려고 하거든요.”
   “아,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는 들은 적 있어요. 지금 쓰고 계시다고.”
   “네, 맞아요. 대표님이 공들인 기획이에요. 황인수 선생님이 지금까지 춘추전국시대로는 책을 낸 적이 없으니까, 공부를 해서 써보라고 한 거예요. 워낙 대형 시리즈를 좋아하시니까. 근데 황인수 선생이 그걸 하기로 하면서 대신 지금 지향씨가 받은 원고를 먼저 내달라고 한 거죠. 음, 그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 원고였던 거예요. 그 원고 별로죠?”
   말문이 막혔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맡은 원고에 대해 감히 부정적인 표현을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괜찮아, 괜찮아!”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알아요, 완전 별로인 거. 나도 그거 원고 검토했었어. 그거 완전 『삼국지를 읽는 저녁』 재탕이에요.”
   『삼국지를 읽는 저녁』은 황인수 선생이 전에 냈던 책의 제목이었다. 그의 책 가운데서는 언론 보도가 가장 많이 되었고, 한 기업의 CEO가 언론 인터뷰에서 여름휴가 동안 그 책을 읽었다고 언급하며 판매도 꽤 되었다. 역사 분야 저술가로서 그의 입지를 다져준 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냥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쳐내면 돼요.”
   은희 선배가 말했다.
   “그 원고가 들어온 게 벌써 언제인데요. 손 비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밀렸던 거죠. 책으로 내주기만 하면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별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나 역시 원고를 읽으며 훌륭하다고 여겼던 건 아니었다. 문체가 딱딱하고, 내용도 재미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나무랄 데 없는 원고라고 판단했고, 오히려 나의 미숙함이 이 책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선배의 말대로 ‘완전 별로’였다. 왜 그걸 몰랐을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못했지? 나는 스스로 되물었다. 이미 여러 책을 출간한 저자라는 것,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중앙 일간지 기자로 오랫동안 일했다는 저자의 이력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향씨한테 일부러 그런 원고를 준 건 아니고, 그동안 손이 비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나의 침묵을 속상함 때문이라 여겼는지,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이런 경우─거래─가 흔한지 물었다.
   “글쎄요, 없지는 않아요. 대작을 받는 조건으로 작은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죠. 근데 그분이 대표님이 기대하는 만큼 역량이 있는 저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문제인 거죠. 그 사람, 지금까지 낸 책 보면 배경이 되는 시대는 다르지만 글의 스타일이나 주제는 비슷비슷해요. 게다가 한 출판사에서 꾸준히 책을 낸 게 아니고 이 회사 저 회사 너무 옮겨 다니거든요.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런데 대표님은 왜……?”
   “대표님이 기자 출신 필자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독자들 눈높이에서 잘 읽히게 쓴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역사물 시리즈를 써낼 만한 저자를 찾고 있기도 했고요. 한번 꽂히면 원래 주변 이야기는 안 들으세요.”
   그때까지 나는 은희 선배를 마음속으로 ‘투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선배가 다르게 보였다.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모습에서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부장님, 실장님 선에서 말려야 하는데…… 에휴, 모르겠네요. 우리가 뭘 어쩌겠어요. 나무야,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마무리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왜 부장님은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별수 없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부장님에게 처음 원고를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첫 출근 한 날이었다. 첫날이라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는 없을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오후에 뜻밖에도 부장님이 회의실로 불렀다.
   그런 원고라서 인턴한테 턱하니 맡겼던 거구나. 어쩐지. 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 막 들어온 애한테 어떻게 그런 자세한 사정을 말하겠어. 게다가 나한테는 첫 원고인데, 대충 만들어도 되는 책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겠지. 괜히 마음 상할까봐, 원고에 편견을 갖게 될까봐 그러셨을 거야.
   금요일 저녁의 자유로는 차들로 꽉 막혔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평소보다 이십분 더 걸려 합정역에 도착했다.

 

*

 

   그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쯤 부장님 자리의 전화가 울렸다. 짧은 통화를 마친 뒤 부장님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대표님이 같이 점심 하자고 하시네.”
   12시 정각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편집부원들의 손에는 모두 수첩과 볼펜이 들려 있었다. 부장님, 실장님 차 두대에 나눠 타고 한정식집으로 갔다. 2층의 조용한 자리로 안내되어 좌식 테이블에 앉자 거대한 쟁반을 든 종업원이 올라왔다. 갖가지 반찬이 담긴 두꺼운 접시들이 넓은 테이블 가득 놓였다.
   곧바로 대표님이 도착했다. 그는 비워둔 가운데 자리에 앉자마자 최근의 시사 이슈에 대해 논평하다가, 바로 새로운 기획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나온 박사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기획이었다. ‘한국학’ 범주에 포함되는 박사논문 가운데 단행본으로 출간할 만한 저술을 가려 시리즈로 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역사든 경제든 철학이든 상관없이 한국과 관련 있는 주제면 되는 거지. 많이 고치지 말고, 최소한만 수정해달라고 해서 책으로 만드는 거야.”
   부장님을 비롯해 편집부원들 모두 수첩에 눈길을 고정한 채 부지런히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 역시 회사 수첩에 교정을 보던 파란 펜으로 대표님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꼼꼼히 받아 적었다. 종이가 얇아서 잉크가 뒷장까지 배어들었다. 나는 필기를 하면서 힐끗힐끗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인턴으로 출근한 첫날 대표님 방에 올라가 인사를 드린 뒤로 가까이서 그를 본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