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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5회

   그는 47년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다. 대표 직함만 유지한 채 뒷선으로 물러난 게 아니라 여전히 활발하게 기획하고 저자를 만나는 현역 출판인이었다. 그의 외양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눈길을 끌 만했다. 짧게 다듬은 은발머리에 무게감 있는 동그란 검정 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목에는 짙은 초록색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은퇴한 디자이너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차림새였다. 마치 우리 회사에서 나오는 책들의 장정 같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차림새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그는 지식과 경험으로 빛났고, 자신의 철학에 걸맞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꾸미고 있었다.
   “시리즈 이름은 ‘한국학 아카이브’로 하는 거지. 직관적이고 간명하지 않아? 어떨 거 같아?”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던 듯, 그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소년 같구나. 나는 그를 훔쳐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만들었는데도 새로운 책을 구상할 때 여전히 눈이 반짝거리는구나.
   대표님의 존재는 내가 푸른서재를 택한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인턴 교육생 프로그램 중에는 출판사 대표들의 강연이 있었다. 나는 그중 푸른서재 대표님의 강연을 기대하고 있었다.
   입사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내게 이름이 익숙한 정도의 회사라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출판사라는 사실이었다. 회사의 역사로든, 규모로든 둘 중 하나는 틀림없었다. 나는 전통있는 인문사회 출판사로 손꼽히는 곳을 몇군데 찍어두고 있었는데, 푸른서재가 그중 하나였다.
   강연이 있던 날, 하나 언니와 앞쪽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두루마기처럼 보이는 겉옷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비단처럼 은은히 빛나는 소재의 옥색 옷이 무릎까지 내려왔다.
   “무슨 도사 같은 느낌인데.”
   하나 언니가 내 어깨를 치며 빙그레 웃었다. 언니는 내가 푸른서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출판 도사네.”
   나도 씩 웃으면서 언니를 쳐다봤다.
   “장풍 쏘겠다, 야.”
   다른 회사 대표들은 강의에서 주로 편집 실무를 다뤘다. 순진한 환상을 품고 출판계에 들어서려 하는 지망생들을 염려한 듯, 비즈니스적인 면을 유독 강조하던 대표도 있었다. 어떤 책이 팔리는지, 어떻게 잘 팔 것인지 등등.
   푸른서재 대표님의 강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어떤 책들을 펴냈는지 설명했는데,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했고 한국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는 책의 정신에 대해, 출판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에 대해 한시간 반 동안이나 지치지 않고 열정을 담아 강의했다. 내가 찾던 게 정확히 그런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난 언제나 ‘의미’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내겐 그런 게 중요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 일을 택하지 않았을 터였다.
   “사랑에 빠졌구나.”
   강연이 끝난 뒤, 하나 언니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너 금사빠지. 맞지? 느낌이 온다.”
   “금사빠가 뭐야?”
   나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금사빠 모르니.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냐고 부인했으나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많은 얼굴들─대체로 남자 어른들이었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준범의 얼굴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시 마음이 아팠지만, 전보다 훨씬 덜했다. 이제 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공부하고 싶은 주제들이 있었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푸른서재의 대표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유명한 인물인 듯했다.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와 인터뷰가 검색되었다. 나는 종로 대형 서점에 나가서 그의 책을 샀다. 강연 중에 그가 언급했던, 그동안 그가 만난 저자와 펴낸 책들이 정리되어 있는 책이었다. 벽돌만큼이나 두꺼웠는데, 펼쳐보니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전부 그 안에 있는 듯했다.
   “대학원 갈 필요가 없어. 여기가 대학원이야. 우리 저자들이 전부 대한민국 최고의 교수들인데.”
   선배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대표님이 내가 낸 보고서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얼굴에 확 열이 났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돈 받고 다니는 대학원이네요.”
   부장님이 미소 띤 얼굴로 맞장구쳤다.
   “지향씨, 돈 받고 대학원 다니는 거네. 축하해.”
   실장님도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요.”
   나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한쪽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불안정해 보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컬을 살리려고 자꾸 머리카락을 부풀리고 있었다. 순간 나의 차림새가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마한 지 삼개월이 지나 부스스한 머리에, 얇은 흰색 셔츠는 후줄근했다. 셔츠와 네이비색 슬랙스는 동대문의 옷가게에서 산 것이었다.
   나는 의류 브랜드를 잘 알지 못했고, 화장하는 법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대학 강의실 안에도 당장 회사로 출근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대학시절, 나는 면 티셔츠나 후드 티를 즐겨 입었다. 신발장 안 내 자리인 세번째 줄에는 운동화 몇켤레와 굽이 낮은 검은색 워커가 있었다. 출근을 앞두고 동대문에 가서 쇼핑을 좀 하긴 했지만, 일반 기업이었다면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을 터였다. 엄청난 옷을 사들여야 했을 것이고, 취향을 완전히 바꿔야만─또는 새로 익혀야만─했을 것이다. 문득 내가 날마다 들고 다니는, 사무실 내 자리에 놓여 있는 합성 피혁 재질의 커다란 갈색 가방이 떠올랐다. 종각역 지하상가의 원형 진열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수많은 가방들 중에서 고른 것이었다. 물건을 잔뜩 넣어 다니는 습관 때문에 손잡이가 하얗게 갈라지고 있었다.
   “사실 우리 회사는 돈을 내고 다녀야 해. 세상 어디에서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어. 아니, 나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표님이 갑자기 짜증 섞인 투로 말해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부장님, 실장님을 흘끗 쳐다봤다. 그들은 웃음 띤 얼굴 그대로 허공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그래.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대표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문 분야가 있어야 돼. 대학원 가도 전공을 정할 거 아냐. 어떤 원고든 다 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해.”
   그는 이제 선배들을 둘러보며 말하고 있었다. 문득 식사하는 내내 대표님 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와 주차장에서 내렸다. 세련된 회사 건물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1층 중앙 로비에 마련된 유리 진열장 안에는 80년대의 친필 원고들이 들어 있었다. 그 옆에는 대표님이 수집하는 동서양의 아름다운 고서들만 모아놓은 진열장이 있었다. 대표님의 차림새처럼, 모두 일관되게 품격있으면서도 세련된 것들이었다. 진열장 유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내 얼굴이 비쳤다.
   이제 스물넷이잖아. 나는 위축되는 마음을 다독였다. 내가 원하는 장소의 일원이 되었잖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지금부터 천천히, 경험을 쌓고 취향을 가꾸어나가면 돼. 인생 전체가 걸릴 과제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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