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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8회

형민은 대입 학력고사 전기 시험에 낙방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대학의 원하지 않는 학과에 지원을 하고 후기 시험을 기다리던 중 시험지 도난 사고가 일어났다. 시험은 연기되었고, 이틀 후에 범인이 잡혔다. 공교롭게도 같은 반의 친구 이름과 같았다. 그 친구도 후기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다지 친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뉴스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전화를 걸어 농담을 하고 싶어졌다. 너 때문에 시험이 연기됐잖아, 하고. 그래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니가 열두번째다. 내가 범인이다, 됐냐?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친구에게 짜장면을 사줄 테니 나오라고 했다. 그날, 둘은 짜장면에 이과두주를 마셨다. 얼음을 먼저 입 안에 넣고 그 다음에 이과두주를 마시니 술술 잘 넘어갔다. 한병 마시고 다시 한병을 주문하면서 그는 친구에게 어째서 얼음을 안주로 먹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친구가 자기가 먹은 첫 안주는 소금이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는 어린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여덟살 이후로 방을 혼자 써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식사 시간에는 수저 놓기나 반찬 나르기 등등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데, 친구는 달걀 프라이 담당이었다. 동생들이 모두 먹성이 좋아서 아침에는 달걀 프라이를 스무개씩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개교기념일이라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 늦잠을 잤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밥통에 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화장실을 가다 막내 여동생의 머리핀을 밟았다. 핀은 부러졌고, 뒤꿈치에서 피가 났다. 짜증이 나서 문지방을 걷어찼다가 엄지발톱에 피멍이 들었다. 한참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발을 주무르다 갑자기 달걀이 생각났다. 어느 드라마에서 본 멍든 눈을 달걀로 문지르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냉장고로 가서 달걀을 꺼내다 친구는 반쯤 마시다 만 소주병을 보았다. 싱크대에서 소주잔을 꺼내 소주 한잔을 따랐다. 그리고 달걀 프라이를 했다. 달걀이 반쯤 익었을 때 친구는 소주를 반 잔 마셨다. 그리고 달걀에 뿌리려 했던 소금을 혓바닥에 뿌렸다. 소금은 짰고, 그래서 익지 않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친구는 그에게 말했다. 그후로 아버지 몰래 소주를 한잔씩 훔쳐 마시곤 했어. 반만 익힌 달걀노른자에 소금을 뿌려서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떠먹어봐. 얼음보다 맛있을 걸. 그날, 둘은 중국집 주방장에게 달걀 프라이를 해달라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욕을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둘은 하하하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 그가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시험 보지 말까? 우리 재수 할까?

형민은 그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원래 바글바글한 집이라 한명 더 는다고 불편한 건 없어. 그러니 편히 놀다 가. 친구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날 그는 요리하는 어른 남자를 처음 보았다. 라면 말고 진짜 요리. 햄과 콩 통조림이 들어간 부대찌개였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형민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그가 술을 마시자 친구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 처음 아니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의 동생 중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아이가 말했다. 큰오빠도 마셨어. 내가 봤어. 그 옆에 있던 남자 아이가 팔꿈치로 여자 아이의 팔을 쳤다. 바보야. 형이 비밀이라 그랬잖아. 그러고는 여자 아이의 밥그릇에 들어 있던 햄을 빼앗아 먹었다. 햄을 빼앗긴 아이가 울먹이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아이가 냄비에서 햄을 꺼내 얼른 동생의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그 잔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친구가 두 손으로 술을 받아 마셨다. 우리 아들도 처음이 아니구나. 그는 다 마신 잔을 내려다보았다. 슬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는 당황했다.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의 동생들이,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데 그렇게 보일까봐 창피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의 아버지가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그렇게 무릎을 두드려주는데 그는 갑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이 서툰 행동을 할 때마다 주변에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가 본 어른들은 세 들어 살았던 남자들뿐이라고. 술과 담배를 혼자 배우게 된 것도, 나이 많은 어른들을 보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주저하게 되는 것도, 여자 앞에 서면 실수를 할까봐 긴장하는 것도, 모두 그 탓으로 돌렸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았지만, 그게 얼마나 미성숙한 생각인지 알았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모든 것은 술을 따라줄 아버지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실수들이 용서가 되었다. 그가 자기연민에 빠져 지내는 동안 그는 어머니가 얼마나 지쳤는지, 얼마나 외로움이 깊어졌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가장 먼저 한 일이 해외 아동 결연을 맺은 거예요. 딸이 태어났을 때는 우물 파기 행사에 이백만원을 보냈어요.” 그는 사회자에게 마지막으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말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첫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에게 옷을 사드렸어야지, 하면서. 그런데도 말이 멈춰지지 않았다. “기침소리로 옆집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어요. 신혼 초에 살던 집은 옆집 기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방음이 되지 않았거든요. 옆집에는 새벽 네시부터 기침을 하는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아내는 늘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어젯밤은 푹 잤다고. 그 말을 듣자 새벽에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고 그래서 119에 신고를 했죠. 할아버지가 욕실에 쓰러져 있더라고요.” 그는 수다를 멈추고 싶었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유치하게도 자신이 살면서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했는지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다. 마치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한국에 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의 핸드폰을 찾아준 이야기도 하고, 길을 걷다 폐지 줍는 노인들만 보면 몰래 리어카를 끌어준다는 이야기도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양 볼이 붉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겨드랑이에서 땀이 났다. 팔을 들면 옷이 땀에 젖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났는데요.” 거래처에 갔다가 일찍 퇴근을 하던 날이었다. 다리 한쪽을 끌다시피 걷는 한 남자가 다가와 그의 무릎 위에 종이를 올려놓았다. 힐끔 보니 어째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는지의 사연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남자의 몸에서는 땀 냄새가 심하게 났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기에 그는 들고 있던 종이를 빈 옆자리에 던졌다.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지하철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누군가 넘어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또다른 누군가는 지하철 비상인터폰을 눌렀다. 잠시 후, 기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넘어져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울음소리에 섞여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비상 인터폰을 눌렀던 남자가 잘못 눌렀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비상인터폰을 보자 최근에 들은 라디오 사연이 떠올랐다. 출근 시간이었는데 누군가 비상 인터폰을 눌러 기관사에서 이렇게 소리쳤다는 거였다. 그만 좀 태워요. 질식해 죽겠어요. 그는 이 상황에 안 어울리는 에피소드를 떠올린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넘어진 남자를 일으켰다. 그는 오른손을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지하철이 정차하자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겨드랑이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그래서 손이 금방 손이 축축해졌다. 남자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남자를 부축해서 벤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어요. 그런데 침이.” 그는 말을 하다 멈추었다. “침이” 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 사회자가 네, 하고 되물었다. 남자는 침을 흘렸고 그래서 그의 어깨도 축축해졌다. 불쾌했지만 그는 꾹 참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어깨가 젖은 셔츠를 빨았다. 향기가 나는 섬유유연제를 잔뜩 넣어 헹구기까지 했다. “박형민씨?” 사회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침을 흘렸는데, 그게 뭐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그가 스튜디오 밖으로 걸어 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사회자도, 작가도, 방청객들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뒤늦게 이상한 점을 눈치챈 메인 작가가 그를 따라 나갔다. “선생님.”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비상계단을 향해 뛰었다. 한번에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방송국을 나와서도 그는 계속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쳤고 그때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처럼 그는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