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그들에게 삶을 돌려주는 일: 유기동물 보호와 동물의 권리

이정숙
이정숙

이정숙

 

한달 전 유기견 보호소에서 개 한마리를 입양했다. 마산에 있는 보호소에서 데려왔다고 하니, 다들 왜 하필 그 먼 데서냐고 묻는다. 후원하고 있는 보호소 세군데 중 마산보호소발 안락사 공고가 급하게 떴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이번엔 안락사 공고가 어떻게 나는지 방식을 묻게 마련이다. 안락사 공고의 기준은 따로 없다. 구조 직후 열흘간의 법적 공고기간이 끝나면 입양을 전제로 일정기간 보호소에서 맡아준다. 그러나 보호소 공간, 즉 케이지에 여유가 없으면 안락사 결정이 내려지고, 들어온 순서대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제주도나 경기도에 있는 보호소는 아직 케이지가 다 차지 않았는데, 마산의 유기견 보호소의 경우 최근 어린 강아지들이 대거 입소하는 바람에 먼저 안락사 공고가 난 것이다.

 

나의 가족이 된 이 개는 안락사당할 뻔했지만 겨우 1년 7개월의 생을 살았을 뿐이다. 강아지 때 맡겨져서 ‘뜬장’이라고 하는 철장에 갇혀 살면서 일주일에 단 7분간 바깥 산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산에서 오전에 출발한 차는 서울까지 오는 동안 서너군데에 다른 입양견을 데려다주고 오느라 밤늦게 도착했다. 개를 데리고 온 봉사자가, “개가 종일 멀미를 해서 침을 많이 흘렸어요”라고 알려주었다. 개의 배에는 입양결정 후에야 비로소 해서 보낸 모양으로 중성화수술 부위가 미처 아물지 않아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개는 처음 3일간은 전혀 짖지 않았다.

 

돌봄이 없으면 동물은 죽는다

 

다큐 형식을 빌린 일본 영화 「개에게 처음 이름을 지어준 날」(2017)에는 후꾸시마 제1원전 20킬로미터 권역의 접근제한구역 부근에서 버려진 동물을 구조하는 나카타니 무라이 씨가 등장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일본정부는 지진 이틀 만에 피난지시구역에 가축 안락사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아, 살아 있었어!” “혼자서 잘 견뎌냈구나!” 그녀는 개와 고양이를 발견하고 눈을 맞추고 구조가능 여부를 확신하고는 엉엉 울면서 구조를 한다. 거기에는 구유 앞에 묶인 채 버려진 젖소들도 있다. 물과 건초를 양껏 줘보지만 이미 먹지 못하는 소들도 있다.

 

인간이 개입하고 나면 동물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결정권이 없어진다. 먹고 기다리고 외출하고 살고 죽는 모든 일이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그러니 아동이 대개 그런 것처럼 동물은 학대가 쉽사리 이루어지는 대상이 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합법화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폭력의 힘으로 동물학대가 제도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구제역이 돌았을 때 행해졌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생매장 현장을 상상해보라. 식용을 위한 도축지 반경 수 킬로미터 밖에까지 풍기는 피비린내를 상상해도 좋다. 거기 개입된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와 그 결과 산출되는 감정적·정신적 고통은 그것을 경험하는 개별 인간의 오롯한 몫일 뿐 아니라, 인간 종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남긴다.

 

고양이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들에게 11월은 고양이 범백의 계절이다. (범백은 범백혈구감소증의 줄임말로 파보바이러스가 원인이 된 구토와 설사를 동반하는 장염의 일종인데, 저체온증에 취약한 아기 고양이가 걸리면 치사율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다.) 늦봄의 수태로 여름에 태어난 아기 고양이로서는 처음 맞는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전염병으로 죽는 것이다. 해마다 11월에 서리가 내릴 때쯤 아기 고양이가 자주 발견된다. 재작년 11월처럼 지난 11월에도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지만, 살리지 못했다. 며칠씩 갖은 애를 썼지만 비탄만이 남았다. 재작년의 실패로 올해는 병원에 전적으로 맡긴 것이 패인이었다. 병원에 맡긴다고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고양이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근했어야 했다는 후회와 슬픔이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길고양이를 처음 입양하던 2011년 가을 무렵 포털의 한 고양이까페에 가입할 때 보니 회원수가 30만이었다. 눈을 의심하면서 0의 개수를 다시 세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50만이 됐고, 유사한 까페만도 여러개다. 2017년 5월 기준 반려동물 보유자는 1천만명을 넘어섰다지만, 그럼에도 고양이는 아무리 구조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방생의 윤리

 

동물은 쥐잡이용 고양이나 젖소처럼 때로는 인간 살림살이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선택되기도 하지만, 대개 동물은 아무것도 인간에게 되돌려줄 것이 없다.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동물에게 생을 오롯이 돌려주려는 행위. ‘방생’의 윤리는 여기 있는 것 같다. 후꾸시마에서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물도 많다고 울먹이면서 “그런 죽음조차 의미있게 만드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을 때, 무라이 씨는 방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고 해도 된다. 그런 점에서 ‘방생’은 종교의 상징적 차원에서만 행해져서는 안 될 것 같다. 공간이 부족하다고, 예산이 부족하다고 멀쩡한 생명에게 가해지는 ‘살처분’을 방관하는 것은 자비의 임무가 아닐 것이다. 보호소 동물들의 표정이 어두운 데는 이유가 있다. 방생이라면, 생이 생다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동물 입장에서 동물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까다롭고 신중하게 입양 보호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거기 더해 유기동물 보호 운동가들은 한결같이 펫샵에서 돈을 주고 개나 고양이를 사지 말 것을 권유한다. 동물이 처한 현실에 대해 좀더 배우고 싶다면, 동물과 함께 생을 누릴 방생의 법을 한수 배우고 싶다면, 15분 분량인 강형욱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을 검색해보기를 권한다. 평온한 얼굴로 동화구연 어법으로 말을 걸어오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동물의 고통과 잔인한 인간의 속성에 두어번 정도 비디오를 멈추게 된다. 그 멈춤의 시간을 거쳐 깨닫는다. 피터 씽어가 말했듯, 동물해방은 인간해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정숙 / 현대문학 연구자

2018.1.10. ⓒ 창비주간논평

Latest posts by changbi (see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