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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진실, 그리고 판타지: 영화 「염력」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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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터놓고 얘기하자면 영화 「염력」(연상호 감독, 2018)의 가족드라마, 코미디, 장르적 판타지는 모두 일단은 알리바이다. 감독은 그 모든 대중영화적 장치를 보호막 삼아 그날의 비극을 낳은 사회적 맥락과 더욱 직접적인 정황,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논란이 되었던 그날의 비극적 현장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의 요체를 과감하고도 생생하게 극화한다. 그날 농성자들이 망루에 올라 경찰과 용역의 진압에 폭력으로 맞선 것은 정상적인 법집행의 공백 속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후의 항변이자 자위수단이었고, 또한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날의 ‘싸움’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인해 농성자들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나 그 와중에도 마치 진압 이상의 목표를 노리는 듯한 무리한 진압방식으로 인해 농성자들은 물론이고 현장에 투입된 진압대원들도 너무나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것.

 

물론 여기서 ‘그날’은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남일당 건물에서 철거보상 문제로 농성시위 중에 있던 철거민들에 대한 경찰특공대의 진압작전 중에 발생한 화재로 말미암아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를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사법적 ‘진실’ 규명의 결과는 시위대 쪽에 모든 책임을 물어 5명의 이른바 ‘공동정범’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상식적인 법감정에서 한참 벗어난 이런 결과가 도출되는 과정에서 사법권력은 재판의 초점을 발화의 직접적·물리적인 원인에 맞추었고, 사건을 사회적 사실관계의 맥락 속에서 고려하려는 당연한 노력을 회피했다. 사실 그러고도 법정에서의 결정적인 증언들은 주로 그날의 참혹했던 정황을 말해줄 뿐이었지만 결국 화염병을 제조했다는 이유로 5명의 시위자들이 동료 시위자와 경찰의 죽음에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용산참사는 그렇게 사법적으로는 완결된 사건이 되고 말았지만, 그날의 진실을 캐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은 이어졌고 그런 성과가 축적되어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 감독, 2012) 같은 압도적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도 결실되었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염력」은 「두 개의 문」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 어떤 매체라도 그날의 참사현장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할 때 경찰의 채증영상을 비롯한 여러 현장기록을 광범위하게 검토·선별해서 활용한 「두 개의 문」을 1차적인 참고자료로 삼게 되지 싶다. 예컨대 「염력」의 긴 농성진압 장면에서 시위 주동자 루미(심은경 분)는 현장진입용 컨테이너박스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경찰 특공대원을 위험을 무릅쓰고 붙잡는데, 고공 크레인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검은 컨테이너박스의 모습은 「두 개의 문」에서도 가장 강조되는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활용해서 (아마도 영화를 통틀어) 극적으로 가장 고조된 순간을 창출한다는 것은 「염력」이 「두 개의 문」이 도달한 용산참사의 핵심적인 진실을 공유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의 근본적 원인으로 무리한 진압작전을 지목하며 경찰특공대와 시위대 모두를 희생자로 조명한다.  또한「두 개의 문」은 재판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증거에서 배제된, 참사 직후 작성된 진압대원들의 증언록을 자주 보여주는데, 더 정돈된 법정에서의 구두증언과 달리 날것의 그 자료들은 그날의 현장을 ‘생지옥’과 같은 표현을 써서 묘사하는 경우가 잦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두 개의 문」은 기본적으로 법정공방을 쫓아가며 그날의 현장을 재구성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넓은 시야를 확보할 여유가 없었다. 집권 초기에 대규모 시위로 위기에 몰린 이명박정권이 준법을 내세워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거나, 더 좁게는 그런 정국 흐름 속에서 경찰 수뇌부가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김석기 당시 서울시경찰청장의 ‘위신’을 세워주려 했다는 가설이 언급될 뿐이다.

 

「염력」은 용산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꺼이 (건설)자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도구 노릇을 하는 국가기구의 본질에서 찾는다. 용역깡패들의 불법 철거집행 과정에서 주인공 루미의 어머니가 사망하지만 단순사고사로 처리되어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 속 감정선의 시발점이 되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너무나 무심하게 대응하는 경찰의 행태가 딱히 격한 공분을 일으키지도 않게 처리된 것을 보면 이 영화는 그런 상황을 한국사회의 굳건한 현실로 상정하는 듯하다. 영화 제목이 지목하는 명목상의 주인공이자 루미의 조력자로 큰 활약을 하는 아버지 캐릭터(류승용 분)도 그런 현실인식을 극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몸을 비트는 어설픈 댄스동작 하나로 대형 승합차 정도는 훌쩍 공중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염력의 소유자인 그가 합류하고서야 시위대는 한번 제대로 맞서 싸워볼 의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막강한 물리적 힘은 긴밀하게 조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권력망 앞에서 무력한 것으로 드러난다. 언론에서 그의 염력을 북한에서 들여온 비밀무기로 설명하자 여론이 나빠지면서 시위대 내부에서조차 그를 경원시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고, 마침 그때 그가 수위로 일하던 전 직장의 고소로 경찰들이 찾아오자 해명을 원했던 그는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오는 설정이지만 그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조잡한 선동과 조작에 숱한 생명이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생각하면 웃음 뒤에 씁쓸함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위대로부터 그를 떼어놓기 위해 이런 상황을 기획한 건설사 임원 홍상무(정유미 분)가 그를 대면하는 즉시 던지는 대사가 육중하게 다가온다. “진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라고요. 에네르기파? 그거 아니에요. 대한민국! 국가 그 자체가 능력인 사람들이라고요.” 염력이 생기고도 한참을 그 초능력을 이용해서 돈 벌 궁리에 몰두했던 그는 홍상무의 세계관을 수긍하는 듯 보인다.

 

영화는 막판에 화끈한 판타지 한판을 마련함으로써 위의 발언을 뒤집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바로 이 영화의 구상이 그로부터 싹을 틔웠을 것으로 짐작되는, 용산참사 현장에 대한 더욱 공정한 재현에의 의지가 발현된 장면이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판타지 장르가 허용하는 시적 허용을 십분 활용하여 (잊혀진 표현을 하나 소환하자면) ‘당파적 객관성’의 견지에서 그날의 사건을 재현한다. 그래서 소수의 시위대를 압박해 들어오는 경찰들의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경찰이 앞세운 고공 크레인은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장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날의 사건을 새로 쓰는 판타지로까지 나아간다. 경찰서에서 뉴스로 진압소식을 알게 된 루미 아버지가 철창을 찢고 현장으로 (말 그대로) 날아가서 철거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앞선 언급한 극적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순간에는 경찰을 도우려다 추락하는 딸을 구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일련의 장면 내내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들은 하나의 상상이라는, 현실원칙이 잠시 유보된 순간의 판타지라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그랬지만 그 장면에서 그의 행동은 희극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듯 영화도 정치적, 사회적 선의만으로 옹호하기는 힘들다.  ‘괴작’으로 결론이 나는 듯한 「염력」이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 바를 이 글에서는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심과 타협의 산물이고 그 결과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작품인 된 것은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중심인물 한명을 부담스러운 소재를 감싸는 당의(糖衣)로 활용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적 설정을 도입했을 때는 그 장르의 팬들이 납득할 만한 장르의 운용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감독이 예술가로서의 본능에 좀더 충실한 다음 작품을 통해 다시 많은 관객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를 기원해본다.

 

이정진 / 문화평론가, 서울대 강사
2018.2.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