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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가까이에 있다: 이향규 『후아유』

김중미

후아유 100작년 봄, 포천의 한 도서관의 초대로 두번에 걸쳐 포천 지역의 다문화가정을 만났다. 처음에는 학생과 부모님들이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형식이었는데 이야기가 허공에서 떠돌다 바닥으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일방적으로 강연을 하는 자리가 무척 불편했고,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다문화가정의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두번째 만났을 때는 아이들은 따로 나가 책을 읽게 하고, 책상을 둥글게 다시 배치한 뒤 부모님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짧은 시간에 자녀 양육의 어려움, 부부관계의 어려움이 쏟아져 나왔으나 그 이야기들을 주워 담아 정리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꽤 많은 예산이 들어갔을 게 분명했지만, ‘다문화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이 그들의 시선이 아닌, 이쪽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탓에 다문화가정에 유익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후로도 다문화가정의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예년보다 많았다. 그래서인지 이주민과 관련된 기사가 좀더 눈에 띄었다. 지난 5월의 돼지농장 노동자 다섯명의 질식사 기사와 네팔 이주노동자 두명의 자살 소식은 그동안 이주민에 대해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했다.

 

““(우리는)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왔다.”
원문을 찾아봤다. 막스 프리슈(Max Frisch)라는 작가가 한 말이란다.
“We wanted a labour force but human beings came.”
사람들,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다 축적되어 있는, 이성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왔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그들은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이고, 에이리언(Aliens)이 아니라 휴먼(Human beings)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후아유』, 창비교육 2018, 170면)

 

2004년부터 시행하는 외국인고용법 제1조에는, “이 법은 외국인근로자를 체계적으로 도입·관리함으로써 원활한 인력수급 및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한국사회가 원한 건 값싼 노동력뿐이었으나 우리 곁으로 온 것은 사람이었다. 산업연수생제도도, 고용허가제도 모두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만이 목적이었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로, 이 나라로 이주해 이웃이 된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도시의 골목을 공유하고 함께 일하면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우리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다. 나 또한 그들과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는 공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아유』를 읽으면서 ‘내 안에 감춰진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고, 내가 끼고 있던 안경 역시 투명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불투명한 안경을 낀 채 여전히 적당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진 편견을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던 것이다.

 

『후아유』의 저자는 한국에서 다문화가족으로 살았고, 이주청소년과 이주여성을 위해 일했으며, 다시 영국에서 이주민으로 살고 있는 이향규씨다. 나는 이주민에 대해 제3자의 눈이 아닌 이주자의 시선으로, 다문화가족의 당사자로 담담하게 풀어간 책을 처음 만났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부끄러웠고, 그 경험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렸을 때 기지촌에서 살았던 덕분에 흑인과 백인인 혼혈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더러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동네 친구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 친구들을 ‘튀기’라고 했다. 저학년 때는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도 했지만 고학년이 되면 데면데면해지고, 흑인피부를 가진 친구는 따돌려졌다. 나는 튀기라는 말이 무척 거북스러웠다. 이 낱말은 다른 피부를 가졌지만 같은 말을 쓰고, 같은 골목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와 나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때 차별의 크기는 딱 한 사람만큼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다문화’라는 말로 집단을 가르게 되었다. 우리와 그들로 나뉜 것이다.

 

“이 이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찰이 필요한 지점은 여기이다. 일단 집단의 이름이 생기고, 개개인의 총합인 것처럼 생각되는 집단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낯선 이를 집단 속에 넣고 충분히 안다고 착각할 수 있다. (…) 집단은 필연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든다. 경계가 생기면 그렇지 않았을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구별이 생긴다.”(58면)

 

지금 우리는 좀더 세련되게 우리와 그들을 경계 짓는다. 교사들은 학교를 소개할 때 흔히 말한다. “우리 학교에는 다문화가 많아요.” 다문화라는 말을 쓰는 교사들이 특별히 다문화 학생들을 차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문화라는 단어가 있음으로 해서 비다문화 학생과 다문화 학생을 가려낸다. 마치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나누는 것처럼.

 

3년 전에 갔던 경기도의 어떤 학교는 다문화특별학교로 지정되어, 다문화가정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자랑하며 꺼내 보인 홍보지에는 단오행사, 송편 빚기, 김장체험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제는 한국 여성들조차 거의 하지 않는 일들이었다.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역시 학교 적응 프로그램이 대부분으로, 비다문화 학생들이 다문화 학생들과 잘 지내도록 돕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학교에서 정말 필요한 교육은 서로의 차이를 수렴하는 문화융합 프로그램일 텐데 다문화 학생들의 적응과 동화를 돕는 프로그램만 있었다.

 

얼마 전 서울대에 합격한 공부방 아이가 사회적 배려 대상자 캠프에 다녀왔다. 2010년대에 들어서서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 학생들 간에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신조어는 지역균등전형, 기회균등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입시 전형방법을 가지고 서로를 구별 짓고, 배제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문제의식을 느낀 서울대에서는 지역균등·기회균등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을 위한 캠프를 열었지만 그것 역시 차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의 시선으로 이들 전형을 보았다. 저자는 평등과 공평, 혹은 공정을 설명하면서 야구장 담장 밖에서 경기를 보려는 키가 다른 세 아이의 모습을 설명한다. 담장 밖에는 같은 높이의 상자 세개가 있다. 아이들은 평등하게 모두 그 상자 위에 올라가 야구를 본다. 그런데 상자는 중간 키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그래서 중간 키 아이는 비로소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고, 키가 큰 아이는 좀더 잘 보고, 키 작은 아이는 여전히 볼 수 없다. 그런데 다음에는 키가 큰 아이에게는 상자를 주지 않고, 중간 키 아이는 상자 하나에, 작은 키의 아이는 상자 두개 위에 올라가게 했다. 세 아이 모두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공정해진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공정함이다.

 

저자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무지개청소년센터,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등에서 일하며 북한 이탈 학생들과 다문화 청소년, 이주여성들을 만난 경험을 통해 이주민들과 함께 동등해지는 길이 그들을 우리 사회에 동화시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북한적인 것’을, ‘이주여성의 문화’를 인정하는 데 있음을 일깨워준다.

 

우리 사회는 구별과 배제, 차별과 편견이 뿌리 깊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존재 그대로 존중받아본 경험이 없는 탓인지 모르겠다. 학벌과 인맥과 연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그러나 그 시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는 오늘을 살 수 없고, 미래를 살아낼 수 없다. 우리는 차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2017년 현재 우리 안의 이주민이 210만이 넘은 상황에서 여전히 앞으로는 변할 거라고, 하루아침에 해결책이 나올리는 없다고 변명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주민만이 아니다. 늘 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여성과 그 여성 위를 군림했던 남성이 평등하게 만나야 하고, 성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과 학벌, 부의 유무와 상관없이 존재 그대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모든 이들이 공존하려면 이제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리의 시선을 걷어내고, 포용과 존중, 연대의 눈으로 만나야 한다. 『후아유』는 그 공존의 길을 거창한 선언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김중미 / 작가

2018.3.7. ⓒ 창비주간논평